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25] 누울 자리 보고 발 뻗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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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14 06:30:40

마치 자식들과 살기 위해 주술을 부렸던 마녀처럼 시어머니는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한동안 목발 신세를 져야 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생활은 불가능했다. 의논 끝에 집에서 간병인의 보살핌을 받기로 했다. 시어머니댁으로 들어간 간병인은 보름을 견디지 못했다. 어떤 간병인은 이틀 만에, 어떤 이는 일주일 만에 손들고 나왔다. 까탈스러운 시어머니 곁을 지키려는 사람이 없었다.

시어머니 성격이 괴팍하다는 걸 아는 자식들도 어머니의 까탈스러움에 적응돼, 어머니를 탓하기보다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았다. 어쩔 수 없는 것과 어쩔 수 있는 것을 구분했다. 모순엔 모른 척, 효엔 순응하는 척, 이율배반이었다. 어머니가 만든 규칙은 집안 남자들의 헤게모니였다. 모순투성이라도 구성원이 침묵하면 규칙이 되고 질서가 되었다. 승연은 ‘몸을 운신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는 조건부 부양에 동의하고서야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빌려준 돈 받는 것만큼 힘든 게 모시던 부모를 돌려보내는 일이다.

현실이 된 두려움은 차원이 달랐다. 하루 세 끼 밥상을 차리는 일보다, 화장실에 따라가 뒤처리 도와주는 일보다, 끊임없는 간섭과 잔소리를 열린 귀로 다 들어야 하는 일이 괴롭고 힘들었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상상할수록 불안이 증폭되는 예기 불안증과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이 두려운 유기 불안증을 앓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승연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더욱 예민하게 굴었다.

시어머니를 모신 후부터 부부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술 냄새 풍기며 들어오는 남편과의 잠자리는 께름칙했다.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온 날은 씻지 않고 달려드는 데다가 발기가 잘 안 됐다. 남편은 전희 과정 없이 승연의 아랫도리만 벗긴 채 억지로 밀어 넣기 바빴다. 애액이 나오지 않아 아팠다. 그래도 남편의 욕정을 받아 주느라 참았다. 시어머니가 종종 새벽에 깨 거실로 나오는 게 신경이 쓰였다. 신음도 조심스러웠다.

시어머니와 함께 산 뒤로 남편은 섹스를 빨리 끝내려 했고 승연은 조급하고 불편한 섹스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일방적인 잠자리가 끝나면 남편은 승연의 기분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늘 하던 대로 물었다. “좋았어?” 좋았냐고? 차라리 묻지 말지. 어떻게 좋을 수가 있나. 어머니 모셔다 놓고 매일 늦게 들어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치르면서 좋았냐고? 안 좋았다고 말하면 좋을 때까지 해 줄 건가. 불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이미 일 끝내고 돌아누운 남편을 보면서 승연은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렇게 사이가 멀어지는 게 나았다. 쌓인 불만을 저축해야 필요할 때 꺼내 쓰니까.

시어머니 모셔다 놓은 후엔 귀가 시간이 늦었다. 자신도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줄여보려 늑장 부리는 거였다. 토요일 일요일엔 회사 고객들 접대를 이유로, 직원들과 산행한다는 이유로 집을 나갔다. 남편은 아내에게 어머니를 맡겨 놓고 나 몰라라 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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