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221] 눈송이 하나, 천 근의 무게를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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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1-27 06:30:02

땅에 묻힌 새의 꿈을 대신해서 두 팔을 쫙 펴고 나는 날듯이 달렸다. 맨살에 스치는 한강의 겨울바람은 회칼처럼 촘촘히 내살을 저미고 내 피부에 들러붙어 있던 유리의 피를 발랐다. 피의 부스러기들이 꽃잎처럼 흩어졌다. 벚나무의 낙화처럼 눈송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죄 많은, 나는 카인이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나는 살인자 앙굴마라였다. 신은 왜 당신이 편애한 아벨이 아닌, 살인자 카인의 후예로 인류의 대를 잇게 했을까. 부처는 왜 자신이 죽인 희생자들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던 살인마 앙굴마라를 감화시켜 제자로 받아들인 것일까.

눈송이 하나가 내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가 불에 덴 듯 녹아 사라졌다. 그 무게에 짓눌려 잠시 휘청거려 넘어질 뻔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둠의 끝에 희미한 빛이 있었다. 종착역이 보였다. 그 끝에 도착해야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반갑게 휘저으며 그 빛을 향해 달려갔다. 저 멀리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지오에게 내가 한 유일한 요청은 독방을 쓰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입소 절차를 마치고 신입 방에서 사흘을 보내고서야 그는 내 바람을 이루어 주었다. 한 평 남짓한 방은 텅 빈 집보다 한층 더 깊은 안정감을 주었다. 아침저녁으로 교도관이 점호하며 내 생사를 확인했다. 잠깐씩이지만 하루 한 번 운동도 했다. 며칠씩 집 바깥에도 나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던 생활보다 햇볕을 더 자주 쬐었다. 하루 세 끼 제공되는 밥과 깔고 덮을 침구·갈아입을 옷 몇 가지·세면도구와 신발·양변기와 세면대·물품 보관대와 싱크대가 내게 주어졌다. 한 번도 켜 본 적 없었지만 채널이 고정되어 있다는 텔레비전과 하늘을 볼 수 있는 작은 창까지, 이곳에 있는 동안은 내 것이었다.

변호사가 영치금을 넣어 주었지만 나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밤에도 소등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어둠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며칠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뜬 보름달은 눈이 부실 지경이어서 아침까지 거의 한잠도 자지 못했다. 창밖에 촉수 높은 가로등이라도 새로 설치한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내 작은방에 가득 차고도 남은 달빛을 끌어안고 구치소에 온 후 처음으로 소리 죽여 울었다. 늘 꺼져 있던 집 앞의 가로등은 집이 철거되면서 함께 사라지겠지, 전구라도 한번 갈아 끼워 놓을걸, 쓸데없는 후회 때문이었다.

- 당신께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해월영에 머물 동안의 일입니다. 당신의 아내 영분은 일주일에 한 번, 서울에서 이곳까지 대관령을 넘어야 하는 먼 길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주었습니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언덕 아래에 내린 다음 장 본 것들을 양손에 무겁게 들고 산비탈을 걸어 올라왔습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직선으로 놓여 세 시간이면 충분하더군요. 그때는 다섯 시간 넘게 걸렸을 거예요.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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