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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미 중앙정보국(CIA) 본부 내에는 1972년 개관된 CIA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현재까지의 스파이 활동 도구·특수 무기 및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연히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다. 이 박물관에선 전시물을 전설적인 5명의 요원 이름을 딴 각 섹션에 나누어 전시하고 있는데 그 5명의 요원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 요원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2차대전 후 무공훈장인 ‘명예십자훈장’을 수여받은 유일한 여성이다. 당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시상하려 했으나 “아직 작전 중이며 할 일이 많다”며 사양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모두 거절했으며 회고록도 남기지 않았다. 친지들조차도 그가 정보요원인지 전혀 몰랐다. 진정한 정보요원이었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버지니아 홀(1906~1982)이다. 그는 1906년 4월6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모험심이 강했고 사냥을 좋아했다. 하버드 대학의 래드클리프 칼리지와 컬럼비아 대학의 바너드 칼리지 등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 프랑스어·이태리어·독일어 등에 능통했다. 졸업 후에 외교관 시험에 응시해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국무부는 여성 외교관을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폴란드·에스토니아·터키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현지 행정요원으로 일하며 정식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당시 여성에게 외교관은 너무 높은 문턱이었다. 게다가 1933년 터키 근무 중 친구들과 사냥을 나가 철조망을 오르다가 산탄총의 안전장치를 풀지 않아 총상을 입어 결국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이 사고로 그는 미 대사관을 떠나야 했고 평생을 의족(義足)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중 2차대전이 발발하자 버지니아 홀은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군 구급차 운전병으로 복무했는데 프랑스가 독일군에 점령당하자 영국으로 탈출했다. 1941년 영국의 정보기관 SOE(특수작전부)는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한 그를 첩보 요원으로 발탁했다. 의족 상태임에도 고강도 군사훈련을 거치고 기밀 통신방법 등을 익혀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통과해 프랑스 작전에 투입되었다. 프랑스로 파견된 최초의 여성 SOE 요원이다.
그는 뉴욕포스트지의 기자로 위장해 프랑스에 잠입했다. 그리고 레지스탕스 조직의 연락망을 구축해 작전 수행을 지원했다. 작전 중 격추당해 레지스탕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연합군 공군 병사들과 포로수용소를 탈주한 병사들을 런던으로 탈출시켰다.
악명 높은 독일 히틀러의 친위 보안기관인 게슈타포(SS)는 체포된 레지스탕스들을 심문해 버지니아 홀이 여성이고 의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게슈타포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프랑스 리옹의 게슈타포 수장이었던 클라우스 바비는 프랑스에서 수천 명을 고문·살해한 ‘리옹의 도살자’로 악명 높았다. 그는 “절뚝거리는 여자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험한 연합군 요원 중 하나다. 우리는 그녀를 찾아내 파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그는 포위망을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안내로 폭설과 강추위 속에 의족을 한 채 고도 2286m의 피레네산맥을 3일 만에 넘어 스페인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결코 좌절하지 않는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943년 영국으로 돌아와 프랑스 작전의 공로로 ‘대영제국훈장(MBE)’을 받았다. 그는 영국 SOE에 복귀했는데 내근 요원으로만 활용하려는 데 분개해 2차대전 중 미국이 창설한 정보기구인 OSS(전략정보국·CIA의 전신)에 자원한 끝에 1944년 채용되었다.
OSS 요원이 된 그는 다시 프랑스로 잠입했다. 그는 머리를 백발로 염색하고 다리를 저는 양치기 시골 할머니로 변장해 활동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아무도 그가 스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연합군 항공기들이 레지스탕스를 위해 무기와 보급품을 투하하기에 알맞은 장소를 알리고, 독일군의 이동 상황을 본부에 보고했다. 그러면서 독일 정보기관의 무전 추적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동했다.
홀은 레지스탕스 3개 대대를 훈련시켜 퇴각하는 독일군에 대한 차단 작전을 전개했다. 홀의 부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전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량 4개를 폭파하고, 전화선을 절단했으며 화물 열차들을 여러 차례 탈선시켜 독일군의 보급망에 타격을 가했다. 그가 지휘하는 레지스탕스 부대는 독일군 150명을 사살하고 500여 명의 포로를 붙잡았다. 게슈타포는 높은 현상금을 내걸고 그를 추적했지만 끝내 체포하지 못했다.
2차대전 종전 후인 1947년 홀은 CIA에 재차 채용되었다. 그는 2차대전 당시 프랑스 비밀공작 때 알게 된 OSS 요원 폴 고일로트(Paul Goillot)와 1950년 결혼했고, 남편과 함께 CIA에서 은퇴할 때까지 근무했다. 그는 프랑스 등 유럽에서 소련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저항 세력을 구축하는 비밀 준(準)군사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CIA의 관료주의와 여성 홀대 분위기 속에서도 CIA의 비밀 작전 부서에서 최초의 여성 책임자가 되었다. 1966년 의무 정년인 60세가 되어 CIA에서 퇴임한 이후 고향인 메릴랜드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가 1982년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1988년 CIA는 그의 이름을 ‘군사정보부대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2016년에는 CIA의 신입요원 교육훈련소를 그의 이름을 따서 ‘버지니아 홀 원정센터’로 명명했다.
버지니아 홀이라는 존재는 일반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안보 역사학자들의 추적에 의해 2017년 이후 소니아 퍼넬의 ‘중요하지 않은 여자’(A Woman of No Importance·2019), 크레이그 그랄리의 ‘거울의 홀’(Hall of Mirrors·2019) 등 그에 관한 몇몇 책이 출간되면서 역사의 장에 공개되었다. 또한 2020년 10월에는 버지니아 홀에 대한 영화 ‘A Call to Spy’가 개봉되었다. 국내에서는 2021년 ‘시크릿 에이전트’란 제목으로 개봉된 바 있다. ‘첩보 세계의 진정한 영웅’이 소리 없이 ‘역사의 장’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해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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