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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사파와 북한의 대남공작 비록(祕錄)
[김동식 기획연재] <10> 김현희 살아서 체포되자… 北 여성 공작원 퇴출
김동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04 06:25:00
 
▲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아직도 평양 말을 사용하는 김현희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폭파범인 김현희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정보기관이 조작한 가짜가 아니라 틀림없는 북한 공작원이기 때문이다.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것은 그가 쓴 수기 나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공작원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자가 공작원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다. 이것이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첫 번째 증거다.
 
김현희는 수기에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해 생활하던 중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초대소에서 공작원 교육 및 훈련을 받던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초대소 지역 내에서 걸어서 이동할 때 누가 봐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대낮에도 마스크와 선글라스·검은 우산을 쓰고 다녀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그런 곳에서 훈련받은 북한 공작원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김현희가 평양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 역시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 침투하는 남파 공작원들은 한국의 말과 문화를 배우는 적구화교육을 받는데 일본이나 중국·유럽 등 해외에 파견되는 공작원들은 한국말을 배우지 않고 본인들이 파견될 국가의 언어를 배운다. 이에 따라 김현희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웠다고 수기에서 밝힌 바 있다.
 
말하자면 김현희는 해외공작원으로서 외국어는 배웠지만 한국말은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현희는 아직도 서울말이나 경상도 말 또는 전라도 말 등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형적인 평안도 사투리, 즉 평양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 틀림없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만약 김현회가 안기부가 조작한 가짜라면 그가 서울말이나 경상도 말·전라도 말 등 한국인들이 쓰는 특정 언어를 잘 사용해야 한다.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에서 많은 여성 공작원을 해임한 것도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고,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또 다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중앙당 대남공작부서에서 여성 공작원들을 해임한 것은 여자는 나약해서 자살용 독약 앰플도 제대로 깨물지 못한다는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북한 공작원들이 자살용으로 사용하는 독약 앰플에는 맹독성 물질인 청산가리(사이안화칼륨)가 가스 형태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앰플을 깨문 다음 숨을 들이마셔야 청산가리 가스가 호흡기 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죽게 되어 있다. 공작원이 자살하겠다는 생각으로 독약 앰플을 깨물었다 하더라도 숨을 들이마셔 가스를 흡입하지 않으면 독약 효과가 떨어져 죽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김현희가 담배에 은닉했던 독약 앰플을 깨물었음에도 죽지 않은 것이 그가 여자이기 때문에 나약해서 독약 가스를 흡입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며 많은 여성공작원을 해임한 것이다.
 
이것은 KAL기 폭파사건의 주범인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하나의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문화부로 부활한 연락부
 
1980년대 말에는 이전에 통전부에 통폐합되었던 연락부가 사회문화부라는 명칭으로 부활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1987년 여름 통일전선부와 연락부를 통폐합해 대외연락부라는 통합 부서를 만들었으나 불과 2년 만인 1989년 초에 대외연락부를 다시 통일전선부와 사회문화부로 분리하는 조치를 취했다.
 
김정일이 통합부서였던 대외연락부를 다시 2개 부서로 분리한 것은 통폐합 이후 구성원 간의 갈등과 마찰이 심화되고 그에 따라 업무 수행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 KAL858기 폭파범 김현희(일본명 하치야 마유미)가 1988년 1월 안기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현희는 수기 ‘나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에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해 생활하던 중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초대소에서 공작원 교육 및 훈련을 받던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연합뉴스
 
 
1987년 대외연락부로 통폐합되기 전의 통일전선부는 대남 정책 수립과 남북 대화통일전선 단체 구축 및 조종대남심리전 등 공개·합법적인 업무를 주로 수행했다. 물론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같은 해외 교포들에 대한 포섭 및 지하조직망 운영 등 비공개적으로 대남 공작 임무도 수행했지만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전선부에 통폐합되기 전의 연락부는 공작원을 남한에 직접 침투시키거나 우회 침투시켜 연고자 또는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대중 단체를 만들고 운영하는 등 비합법적인 공작을 기본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통일전선부와 연락부가 통폐합된 후 이들 사이에 통합은커녕 내부 파열음이 상당히 심했다비합법적이고 비공개적인 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연락부의 업무 방식과 주로 합법적이며 공개적인 활동을 기본으로 하던 통전부의 업무 스타일 방식이 완벽하게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공작 성과는 고사하고 업무 추진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이 발생했다.
 
이와 같은 부작용 때문에 통일전선부와 연락부를 통폐합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2개 부서, 즉 통일전선부와 사회문화부로 분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통합부서를 분리하면서 예전 명칭을 다시 사용하게 된 통일전선부는 대남담당비서 허담이 통일전선부장을 겸직하면서 이전에 담당했던 대남 정책 수립과 남북 대화·통일전선 공작·대남 심리전 등의 업무를 그대로 수행하게 됐다.
 
그러나 연락부의 후신으로 부활된 공작 부서는 명칭이 연락부에서 사회문화부로 바뀌었다. 또한 업무 범위도 기존에 연락부에서 수행했던 국내 지하당 조직 구축·지도와 함께 부서 통합 전 통일전선부에서 일본 등 세계 각국 해외교포들을 상대로 추진했던 지하당 공작 일체를 가져다 수행하도록 했다.
 
새로운 명칭으로 부활한 중앙당 사회문화부장에는 당시 정무원 문화예술부장이었던 이창선을 임명했다일반적으로 북한에서는 노동당 중앙위원회(중앙당) 부서 책임자(부장)가 내각의 부서 책임자(상 또는 위원장)보다 지위가 높다. 결국 정무원 문화예술부장이 중앙당 사회문화부장에 임명된 것은 수평 이동이 아니라 승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문화예술부장이 사회문화부장에 임명되었으니 부서 명칭과 책임자만 보면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여 표면적으로는 아주 그럴듯한 인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김정일이 대남공작부서인 사회문화부의 임무와 역할을 대외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취한 의도적인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정무원 문화예술부장을 중앙당 공작부서 책임자인 사회문화부장에 임명함으로써 사회문화부가 실제로 수행하는 임무가 대남 공작이 아니라 문화예술 관련 업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창선을 사회문화부장에 임명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창선은 1970년대 초반 김정일이 문화예술계 내부에 후계 체제를 구축할 때 곁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김정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관계로 이창선이 대남 공작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음에도 대남공작부서 책임자로 전격 발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창선은 공작부서인 중앙당 사회문화부장에 임명된 다음 남파 공작원들에게 시도 쓰고 소설도 쓰라고 지시함으로써 그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통일의 봉화를 지펴라
 
김정일은 통일전선부에 통폐합되었던 연락부를 사회문화부로 분리 독립시키면서 공작원을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도 새로 창설했다.
 
원래 공작원 양성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연락부나 대외정보조사부 등에서 선발한 공작원을 2·3명씩 조를 편성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소속 초대소에 입소시킨 다음 공작원 양성반 담당 교수들이 초대소마다 방문해 개별 강의를 하는 방식으로 공작원 교육과 훈련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전투원 양성과 공작원 양성을 함께 담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던 것을 1989년 초 공작원 전문 교육기관인 봉화정치학원을 새로 창설하면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공작원 양성반 과정을 분리해 봉화정치학원으로 이관하도록 하고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는 전투원 양성반만 남겨두었다.
 
봉화정치학원은 조국 통일의 봉화를 지펴 올린다는 의미에서 봉화라는 명칭을 붙이고 과거 남조선혁명 전사들을 양성하던 강동정치학원의 명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정치학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했다.
 
그리고 김정일이 봉화정치학원 창설을 승인한 날짜가 1.12일이라는 의미에서 대외적으로 ‘112연락소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봉화정치학원이 공작원 전문 양성기관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기존처럼 중앙당 작전부가 아니라 대남 공작을 담당하는 중앙당 사회문화부에 배속시키는 조치도 동시에 취했다. 그러나 대남 침투 전문 요원, 즉 전투원을 양성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원래대로 대남 침투를 담당하는 중앙당 작전부 소속으로 남겨 두었다.
 
한편,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공작원 양성 과정을 분리해 봉화정치학원을 창설하면서 원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소속되어 있던 남파 공작원들의 필수 교육코스 남조선환경관도 봉화정치학원 소속으로 이관했다.
 
이에 따라 봉화정치학원 소속 초대소 지역 한가운데에 터널을 뚫고 한국의 거리처럼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어 놓은 다음 그곳에 들어가 시설들을 실제 이용해 보는 방식으로 남한 적응 실습을 하는 남조선환경관(일명 적구화환경관)에 소속되어 있던 고등학생·어부 출신의 수많은 한국인 납북자들도 소속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봉화정치학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프로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공작원으로 15년 활동(1981~1995)
-19901차 침투 후 이선실 대동 복귀·간첩망 구축 등 공작임무 수행 후 복귀.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952차로 남파되어 간첩망 구축·거물 간첩 접선 등 임무 수행하다 검거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1999~2006)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2008~2020)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S파일운영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저서
박사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 2013)
북한 대남전략의 실체’(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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