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신화가 있다… ‘그림이 있는 질마재 신화’ 출간 황주리 작가 [인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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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의 질마재 신화와 황주리의 내수동 신화가 만날 때

임유이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7-15 10:43:11

화가 황주리가 미당 서정주 시인의 ‘질마재 신화’(1975) 출간 50주년을 기념해 ‘그림이 있는 질마재 神話(신화)’(은행나무)를 펴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미당 시에 바치는 회화적 오마주’라고 말한다.

‘질마재 신화’는 서정주의 고향인 ‘질마재’를 소재로 끝내 되찾고 돌아가야 할 고향, 그 원초적 세계를 생생히 묘파한 시집이다. 고향은 우리 몸과 마음 밭에 새겨져 전해져오는 영원한 신화적 세계의 처소로서 현대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황주리는 “미당에게 질마재 신화가 있다면 나에게는 내수동 신화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돼 버린 종로구 내수동 181번지가 그의 고향이다.

“우리 집 막다른 골목 입구에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나는 뜨거운 탕에 들어가는 게 몹시 싫었는데 어머니는 물속에서 백을 세지 않으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는 말로 겁을 주곤 했다. 나는 정말 망태 할아버지가 나타날까, 목욕탕의 뿌연 유리를 주시하곤 했다.”

▲ 이스탄불 '순수박물관'에서 퓌순의 물건을 구경하는 관람객들. 순수박물관

황주리는 터키 여행길, 이스탄불의 순수박물관(The Museum of Innocence)을 방문한 적이 있다. ‘순수박물관’(2008)은 원래 오르한 파묵의 소설 제목이다. 소설은 주인공 케말이 연인인 퓌순을 잊지 못해 그를 추억하는 ‘순수의 박물관’을 꾸민다는 내용이다.

소설 속 순수박물관이 현실의 순수박물관으로 태어난 것은 2012년의 일이다. 퓌순이 실제 존재하기라도 했듯 순수박물관에는 그가 피운 4213개의 담배꽁초와 재떨이·식기·가방·구두·옷 등이 전시돼 있다.

재밌는 것은 순수박물관이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 어릴 적 살던 집을 개조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파묵은 소설 속 박물관을 자신의 공간에 구현함으로 실질적으로 소설을 완성했다. 순수박물관은 파묵의 인생과 소설 속 주인공의 인생이 만나는 지점이다.

황주리는 그날 순수박물관이 있는 골목길에서 오래된 공중목욕탕을 발견하고 발길이 얼어붙었다. 남들은 아무 관심도 없을 목욕탕이지만 황주리는 망태 할아버지가 어른대던 어린 시절 목욕탕이 생각나 그곳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순수박물관은 파묵, 케말, 황주리 세 인생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이는 문학작품의 본질이자 우리가 시와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 작품 속 인물, 독자의 인생은 그렇게 우연히 결국 기어이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고야 마는 것이다.

질마재는 성인이 된 미당과 어린 시절의 미당 그리고 황주리를 한 점에서 만나게 해 주는 접점이다. 우리가 살았던 모든 장소,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각자의 신화 속에서 그것은 살아 있다. 그것을 되살리고 꺼내 주는 게 문학이다.

“올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0년째 되는 해다. 영원히 내 곁에 계실 것만 같았던 아버지가 결국 떠난 것처럼 아버지가 북한산 자락에 마련해준 내 오래된 작업실도 머지않아 다른 장소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집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집에 대한 추억, 아버지에 대한 기억까지 사라지진 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종군작가였던 황준성 씨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신태양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해 ‘신태양’ ‘여상’ ‘명랑’ ‘실화’ ‘소설공원’ ‘흑막’ ‘내막’ 등의 잡지와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했던 우리나라 출판계의 거목이었다.

“살아생전 아버지께 용돈 한 번 드려보지 못했다. 남은 시간이 많을 줄 알았다. 계절이 바뀌어 산소를 찾을 때마다 우리 형제는 이런저런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빈다. 그 옛날 타 쓰기만 한 것처럼 우리는 또 저세상에 계신 아버지께 용돈을 달라고 졸라대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추억은 작품을 통해 되살아난다. ‘그림이 있는 질마재 신화’는 토속적이고 원형적인 미당의 정신세계지만 활달하고 자유로운 황주리의 그림 세계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이 질마재 신화에 갇히지 않고 사적 경험이 더해진 황주리의 광화문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황주리는 시대가 서정주를 변절자로 낙인찍는 것에 대해 “사람은 몇 차례의 변화를 거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오래전 ‘군국주의적 민족주의자’ 미시마 유키오를 가장 싫어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양을 쫓는 모험’은 미시마 유키오의 ‘나쓰코의 모험’를 모티브로 했다. 서정주의 '친일 시' 몇 편은 스무 살 미성숙하던 시절의 짧은 흔적이다. 그 흔적으로 미당의 깊고 넓은 문학을 통째로 폄하하는 것은 시대의 넌센스다”고 말했다.

아울러 “작품과 작가를 분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평생을 들여 일군 문학적 업적까지 변절이라는 단어 안에 우겨 넣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고 했다.

임유이 기자 lye@skyedaily.com 기자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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