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비상계엄 이후 ‘국민저항권’이 자주 언급된다. 행정부 수반(대통령)과 입법부(국회)가 각각 ‘계엄’ ‘탄핵’이라는 헌법적 고유 권한을 가지듯, 법치국가의 기본질서를 어긴 공권력에 대해 행할 수 있는 최후의 비상수단으로 주권자에게 부여된 것이 저항권이다. 다만 대통령중심제 자유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은 반(反)국가 세력에 맞서 ‘헌정 수호’를 외치며 나섰다가 정치적 살해 위기에 처했고 이런 대통령 편에 선 사람들이 기댈 게 국민저항권뿐이라면 분명 절박하고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대부분의 국가가 저항권 관련 명문 규정을 따로 두지 않고 있으나 자연법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돼 왔다. 우리나라 헌법 서문의 “불의에 항거한 4·19이념을 계승한다”는 대목이 국민저항권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지난 20여 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 범야권 주도의 시위에 이 논리가 깔려 있었으나 이젠 그것들의 시비를 판단할 수 있게 됐다. 비상계엄 덕분에 반국가적 흐름이 존재한다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저항권 행사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회복 및 유지라는 소극적 목적에 한정되어야 하며 체제 전복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게 통설이다. 그래서 무력 혁명에 의한 공산정권이나 이란 같은 신정(神政) 체제의 수립 등을 국민저항권 행사로 보진 않는다.
21세기의 이상적인 국민저항권 행사는 지지율과 평화적 집회, 온라인 정보 및 댓글·좋아요 표시 등을 포함한 여론전 아닐까. 현재 70·80과 20·30세대가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국민 저항에 나선 모양새이며 이는 계속 확산될 전망이다. 자력으로 내 집 마련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취직도 어려워 연애·결혼·출산의 꿈 역시 사라진 가운데 20·30세대가 대한민국의 가치와 그것을 건설한 세대에 대한 고마움에 눈뜨게 된 것이다. 청년층 합류로 문화적 파급력도 수직 상승 중이다. 산업화의 그늘을 노래함으로써 한 세대의 논리·감성을 지배한 이른바 ‘운동권 가요’ 전성기를 연상시킨다. 시국을 풍자한 멋진 노래들이 그때보다 진화한 형태로 쏟아지고 있다. 이 또한 국민저항권의 발현이다.
국민저항권이란 개념이 성립할 당시엔 거대 야당의 입법부, 이에 보조를 맞춘 사법부·사정(司正)기관·언론을 그 대상으로 상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공권력의 불법과 주류 언론의 불공정을 모두가 목도하게 됐다. 헌법적 권한을 행사한 대통령을 내란 수괴로 몰더니 해당 수사권이 없는 기관이 체포에 앞장선 것, 영장을 발부한 판사가 형법의 주요 관련 조항을 예외적으로 한다는 단서를 달아 국회 입법권을 침해한 것, 1급 보안시설인 대통령 관저 진입을 위해 공문서가 위조된 것 등이 기본질서 문란 아니면 뭔가. 심지어 대통령직에 대한 생사 여탈권을 쥔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 왔거나 배우자가 탄핵소추단 측 로펌에 근무하거나 근친이 탄핵추진운동 중심 인물인데도 ‘이해충돌의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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