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09] 귀국독주회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5-22 06:25:30

권지호가 쪽지에 남긴 만날 장소는 모텔이 아니었다. 연세대 앞에 있는 ‘시티라이프’라는 카페였다. 권지호는 위치까지 그려 놓았다. 희숙은 ‘시티라이프’가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신촌은 희숙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쪽지 하단에 의상은 최대한 포멀하게, 라고 적혀 있었다. 희숙은 그가 뜬금없이 신촌 로터리 근처에서 만나자는 것과 최대한 포멀한 의상으로 갖추라고 한 의도가 궁금했다. 옷장을 뒤지니 스커트는 하나도 없고 청바지와 스웨터·셔츠뿐이었다. 희숙에게 정장에 가까운 의상은 검정 슬랙스와 베이지색 블라우스, 그리고 아버지가 사준 감색 조이너스 가을 코트가 전부였다.

희숙은 신촌역에서 내렸다. 그레이스 백화점 옆으로 난 길은 시티라이프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시티라이프가 있는 지하 입구에서 권지호를 만났다. 공장이나 공장 주변이 아닌 곳에서 권지호를 만나니 낯설고 생소했다. 권지호는 희숙의 차림을 보자 놀라는 기색이었다. 권지호는 희숙의 손을 잡고 그레이스 백화점 여성복매장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희숙은 영문을 몰라 무슨 일인지 물었다.

권지호는 매장을 한 바퀴를 돌더니 한 브랜드 앞에 섰다. 마네킹이 입은 원피스를 가리키며 입어 보라고 했다. 목 부분에 분홍색 셔링이 달린 원피스는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쉬폰 소재에 분홍 색감이 화려했다. 날씬하고 키가 큰 희숙에게 잘 어울렸다. 권지호는 옷이 날개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원피스 값을 계산했다. 희숙은 자기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걸어가는 그가 싫지 않았다. “어딜 가는데요?”

“응, 음악회 갈 거야.” 연세대 대강당으로. 희숙은 권지호가 음악회에 자길 데리고 간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기쁘고 긴장됐다. ‘나를 좋아하는구나.’ 희숙은 권지호에게 원피스를 왜 비싼 백화점에서 사느냐, 이대 앞에 가면 옷 가게가 넘친다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너 혹시 이대 다녔니? 연대 다녔나 했는데….” 권지호의 기습 질문에 희숙은 얼어붙어 말끝을 흐렸다. 제가 무슨 이대요…. 권지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권지호는 좋은 데로 가서 저녁 하려 했는데 학교 근처라 괜찮은 곳이 없다며 희숙을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희숙은 변태섭과 가끔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영화를 보거나 음악회를 즐기며 데이트하길 바랐다. 변태섭과 단성사에서 본 터미네이터 이후 다신 그와 영화관을 찾은 적이 없었다.

“무슨 음악회죠?” 희숙은 안심 스테이크를 썰면서 우아한 드레스에 맞게 낮은 톤으로 물었다.

“응. 김근화 귀국독주회라고. 연대 음대 나온 여자 동기야. 초대장이 왔길래.” 희숙은 입가에 미소가 흐르는 걸 억지로 참았다. 연대 동문 귀국독주회면 분명 권지호 친구들이나 선후배, 학교 은사도 만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자리에 회사 여직원인 자신과 동행하다니. 사실, 희숙은 권지호와 속정을 맺은 후 고민이 깊었다. 희숙은 권지호에게 끌리고 있었다. 변태섭을 사랑하지만, 권지호가 자신에게 프러포즈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희숙은 자신이 없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박선경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정기 후원
일반 후원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스카이데일리는 온라인 판 스카이데일리닷컴과 32면 대판으로
매일 발행되는 일간종합신문 스카이데일리(조간)를 통해 독자 여러분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후원자 분들께는 지면광고를 하고자 하실 경우
특별 할인가격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