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96] 성적 자기 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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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30 06:20:55

“묻기로 한 건 말 안 했어요! 내가 수정이한테 말한 건, 스스로 내린 성적 결정에 따라 상대를 선택하고 성관계 해야 진정한 여성해방이라 했던 여성 운동권 얘기였다고요. 성 해방 운동 덕분에 요즘 여자들 성 기득권이 된 거라. 내가 어떻게 그 얘기를 하겠어요. 기억하기 싫은 악몽인데.”

강윤희는 억울하다는 듯이 울먹였다. 자신의 과거를 폭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을까. 묻기로 한 건 말 안 했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강윤희 입에서 무겁고 두려운 내용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로 전 입으로 내뱉은 말조차 후회하는 것 같은 강윤희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봉인된 저주가 기억났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도 강윤희 존재를 기억하지 못했건만 성적 결정권이란 단어 하나가 귀에 꽂히자 기억이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과거가 되살아났다. 아버지와 김태주가 떠난 뒤 모두 삭제해 버린 기억이었다.

86건대항쟁 이후 각 대학 비밀서클이나 언더로 활동했던 조직들은 조직 강화라는 기치 아래 지부별로 소규모 연합 세미나를 자주 열었다. 본격적인 대중 민주화를 꾀하기 위해 전국 규모의 학생운동 연합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전대협 결성일 한 달 앞두고 농활 겸 연합동아리 워크숍이 열렸고 그곳에서 강윤희를 만났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 주머니가 많이 달린 국방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목소리나 외모가 남성스럽지는 않았는데 강윤희는 일부러 괄괄한 목소리를 내며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등 여성성을 거부하는 듯한 행동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눈빛과 말하는 습관,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승연은 기억이 한 가지씩 떠오르자 더욱 참을 수 없었다.

“왜 제 딸한테 벌거벗고 무슨 의식을 했다는 둥 남녀가 뒤엉켜 잤다는 둥 그런 말을 한 거죠?” 강윤희는 둘러댈 변명을 미리 정리해 왔는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얘긴 쉬쉬해서 그렇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긴데, 없는 걸 지어낸 것도 아니고. 안 그래요? 동아리 세미나하고 나서 동아리 방이나 선배들 자취방에서 섞여 잤잖아요. 1박2일 합숙 세미나 이럴 때 다 한방에서 잤지. 잤다고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한방에서 잤던 건 확실하잖아요. 분명히 내가 보는 데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여자도 자기가 자고 싶은 상대와 잘 수 있어야 한다면서 우리 보고 자고 싶은 사람 찍어 보라 한 거 생각 안 나요? 난 똑똑히 기억하는걸. 수정이 엄마도 왔던 그 워크숍에서도 그랬던 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순과 승연이 농반 활동하면서 87년 여름 연합동아리 워크숍에 갔던 일이 뚜렷하게 기억났다. 한때 미국 유학을 꿈꾸기도 했던 그녀는 반제반미 투사가 되어 미국을 증오했다. 시위할 때 앞줄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던 그녀, 구치소에 끌려가서도 경찰에게 미제의 앞잡이들이라고 소리 지르던 그녀, 농반에서 가장 장구를 잘 쳤던 그녀. 잔치국수 한 그릇을 1분 안에 먹는 그녀, 혼자인 삶을 한 번만이라도 살아 봤으면 좋겠다던 그녀, 기순이 생각에 승연은 목이 메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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