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95] 기억과 현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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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29 06:20:56

승준 엄마는 존댓말과 반말 사이를 오갔다. 승연은 승준 엄마 이야기를 듣고 머리가 하얘졌다. 그 얘기라니, 묻기로 했다니, 그 일이랑 상관없다니 무슨 얘기지? 정리가 필요했다.

승연은 차분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횡설수설하지 말고 승준 엄마는 나를 어떻게 아는지,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말하세요. 순간 승준 엄마 표정이 달라졌다. 어라? 그 일을 모르는 척해? 승준 엄마는 옷매무새를 다듬었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커피숍에 들어오자마자 급하게 변명하던 좀 전과 다른 태세 전환이었다.

기억 안 난다는 게 승준 엄마에게 유리한 건지 불리한 건지도 감이 없었다. 전화해서 승준이한테 말하겠다, 했을 땐 자세를 낮추더니 승연이 무슨 소린지 모른다니까 다시 기선을 잡은 듯 행동했다. 상대방이 모르면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만을 들춰 내고 상대방이 알면 불리한 증거는 감추는 게 상책이었다. 승준 엄마는 기억을 조작하는 게 가능한지 테스트부터 했다. 내 이름은 강윤희. 이름만 예쁘고 얼굴은 안 예쁘다고 놀렸던. 기억나죠? 승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승연이 눈을 껌벅이는 걸로 봐서 기억이 없다는 거다.

‘나쁜 년. 그래, 넌 내 이름 따윈 기억에도 없는 거지. 예쁜 년들은 자기보다 예쁜 년들 아니면 기억 못 하더라.’

승준 엄마는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 할지라도 숙박하며 밥도 먹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승준 엄마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기 아들에게 전달할 내용도 없다는 뜻이었다. 승준 엄마는 한 번 더 간을 봤다. 김은주, 이정희, 이지은, 박은숙 기억 안 나요? 우리는 다 오승연을 기억하는데. 승연은 당황했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승준 엄마의 조롱 섞인 비웃음이 갑자기 그녀의 태도를 바꾼 주요한 단서라는 걸 눈치챘다. 승연은 승준 엄마의 조롱을 똑같이 복사했다.

“다른 사람은 다 기억 안 나는데 강윤희 씨, 승준 엄마 이름은 기억나네요. 이름이 너무 예뻐서, 가만히 보니, 얼굴도 기억나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있죠. 눈빛이요. 그건 절대 못 바꾸거든요.”

사실 승연은 강윤희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쁜 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춘 채 베팅하며 상대를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 블러핑의 기본이다. 승준 엄마는 승연의 블러핑에 걸려들었다. 자신이 결혼 전에 성형 수술을 해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느낌이 남아 있나보다는 둥, 눈빛은 못 바꾼다는 둥, 자기 이름이 예뻐서 얼굴을 기억해 낸다는 둥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다. 이제 강윤희가 어디서 자길 봤는지 실토하게 하는 것만 남았다. 승연은 먼저 묻는 것보다 강윤희가 단서를 제공하도록 유인해야 했다.

“수정이한테 별의 별소리 다 했던데요. 수정이가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도대체 묻기로 했다면서 왜 쓸데없는 소릴 했냐고요?” 승연이 미소를 거두고 취조하듯 단호하게 물었다. 목이 타는지 강윤희는 테이블에 놓인 두 잔의 물을 연거푸 들이마셨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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