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7] 물과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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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17 06:30:02

승연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 대기했다. 꾸물대다 버스 놓쳐 다음 배차까지 한 시간여나 기다리는 건 끔찍했다. 기다리는 동안 시골 마을을 감상하긴 더 싫었다.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하릴없이 학교 안을 배회해야 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어슬렁거릴 곳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만우관 앞 계단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영어 회화 테이프를 틀었다. 계단 맨 위쪽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데 검은 그림자가 해를 가렸다. 귀에서 이어폰을 내리고 해를 가린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 175cm 정도에 언뜻 봐도 하얀 얼굴에 청바지를 입은 남학생이었다.

경제학과 3학년 누구라고 밝혔는데 잘 듣지 못했다. 승연은 남학생에게 비켜 달라는 말 대신, 앉은 채 옆으로 두 뼘쯤 옮겼다. 다시 귀에 이어폰을 꽂으려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승연이 반응을 하지 않자 그는 주위를 쓱 둘러보는 시늉을 하고는 몇 마디 더 건넬까 말까 머뭇거리다 자리를 떴다. 승연은 터벅터벅 걸어가는 남학생의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한 번 찍어 보고 포기하냐?’ 어차피 관심 없었다고 변명하겠지. 여우의 신포도처럼. 물론 승연은, 이 학교에서 CC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다. 서울대 멋진 남자친구도 걷어찬 여자가 아닌가. 승연은 만나는 상대가 자신보다 어떤 면에서든 나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승연의 생각이 아니었다. 어머니 말씀이었다. 돈은 없다가도 생기고 외모 잘생겨 봐야 아무 짝에도 쓸 게 없지만 머리 나쁜 놈이 책임감마저 없으면 가족 고생시킨다는 어머니의 배우자 관이 승연의 이성관을 지배했다.

승연은 내내 친구들과 어색한 거리를 유지했다. 과 동기들도 학교에 흥미도 애정도 못 느끼는 승연에게 굳이 말을 건네지 않았다. 승연은 자신의 선택과 불만을 학교 친구들이 공감하길 기대하지 않았다. 승연은 자기가 적응하든 못하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길 바랐다. 자꾸 적응해야 한다느니, 너만 손해라느니 하는 어설픈 참견과 어줍잖은 충고는 멈춰 줬으면 했다. 승연은 학교에 적응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서울과 지방 학생들의 차이는 옷차림이었다. 오산은 하루가 멀다고 최루탄 가스 분진이 날아다녔다. 옷은 눈물 콧물 쏟아내며 흘린 분비물로 얼룩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공사 트럭이 드나드는 바람에 흙먼지는 덤이었다. 좋은 옷이 필요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도 스타일은 포기 못 해! 흙바닥을 스틸레토 힐로 휘젓고 다니는 여학생들은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향수 냄새 풍기는 한 줌 부르주아들이었다. 승연도 민낯의 부르주아에 속했다.

흰 피부·곱슬머리·고급 운동화·진(Jean) 브랜드 중 최고봉인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청바지. 자연스럽게 물 위 기름으로 분류된 존재였다.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청바지는 대기업 사무직 한 달 월급과 맞먹는 가격이었다. 오산 학우들은 승연이 입은 청바지 브랜드가 마리떼인지 파리떼인지 구분 못 하겠지만 서울 대학가나 강남에선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를 입는 게 유행이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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