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Talk] 포항 방화 사건 미담과 괴담 사이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기자수첩

양준규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2-26 00:02:30

2024년 12월2일 일어난 포항 아파트 방화 사건으로 가해자의 두 아들이 중상을 입었다. 12월14일 끔찍한 사고를 당한 형제 중 형이 X(전 트위터)를 통해 현재 상황을 밝혔다.

형은 손과 얼굴에 2도 화상을 입었고 동생은 전신의 89%에 3도 화상을 입어서 생존 확률이 15%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1차 수술에 3억3400만 원이 들고 2차 수술에는 5억 원에 달하는 비용이 들지만 화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으며 정부 지원 또한 산재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후 베스티안재단의 도움으로 1차 기부 계좌가 열렸다.

동생이 해군 출신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해군 장병들이 1000만 원을 모금했고 형 쪽은 ‘프린세스 커넥트’와 ‘블루 아카이브’를 비롯한 서브컬처 그림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서브컬처 팬층에서도 기부 릴레이가 이어졌다.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 블루 아카이브 갤러리에 올라온 누적 기부 집계액만 1억4000만 원에 이르렀고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힘을 보탰다. 이렇게 3일 만에 5억 원이라는 금액이 모였다. 포항 방화 사건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딛고 따뜻한 손길이 모여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가 나오며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1차 모집을 끝내고 대리인을 선임하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해당 인물은 기부를 주도한 커뮤니티와 꾸준히 마찰을 빚었던 인물이다.

설상가상으로 대리인이 X에서 해당 커뮤니티들을 ‘기부하는 걸로 뽕 채우는 집단’이며 ‘내가 받은 임무는 긁기(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의미의 인터넷 은어)다’ 등의 발언으로 논란을 키웠다.

기부하면서 뽕을 채운다는 말을 풀어 쓰면 기부하면서 자존감을 높이거나 기분 좋아하는 사람 정도가 되겠다. 글로 쓰니까 상당히 좋은 사람 같지만 문맥상 모욕적인 의미로 쓰였고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기부하고 욕을 얻어먹은 사람들은 기부를 후회하기 시작했고 대리인의 공격적인 언행은 계속됐다. 이에 기부 환불을 원한다는 여론이 높아졌고 다른 화재 피해자를 위해 기부금을 사용하는 쪽으로 기부 대상 변경이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베스티안재단에 환불 및 변경 문의가 빗발쳤다. 일시적으로 베스티안재단 홈페이지가 다운되기도 했다.

이후 피해자가 병원비 정산이 안 되고 있으니 환불을 중단해 달라는 글을 올렸으나 성난 여론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기부금을 환불하거나 대상을 변경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 전에 말하고 싶은 것은 피해자나 대리인이 “기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훈훈한 미담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대리인 선임 당시 논란이 있었어도 사람 살리자고 하는 일인데 환불까지 해야 하느냐는 여론이 더 지지받았다.

화재 피해자를 위해 선뜻 손을 내민 사람들의 손에 침을 뱉어서 피해자가 곤란한 지경에 빠진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앞으로 기부에 대한 냉소주의가 더 힘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앞으로 인터넷이나 SNS를 위한 모금이 벌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 사건을 떠올릴 것이고 손을 내미는 사람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추운 겨울 들려왔던 따뜻한 미담은 괴담이 됐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얼어붙었다. 계절이 바뀌고 날이 따뜻해져도 사람의 마음이 녹는 데에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참 슬픈 일이다.

양준규 기자 jgyang@skyedaily.com 기자페이지 +

후원하기

정기 후원
일반 후원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시대의 금기를 깨는 정론지 스카이데일리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만들어집니다.

정기 후원 독자께는
스카이데일리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초대, 할인 혜택 등을 드립니다.

매월 5만 원 이상 정기 후원 독자께는
스카이데일리 신문과
스카이데일리가 발행하는 최신 단행본을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