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47] 민중이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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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19 06:30:14

기순은 농반 회원들과 함께 시위도 열심히, 세미나도 열심히, 연주 연습도 열심히 했다. 처음 농반에 가입할 당시, 그녀는 학생운동이나 시국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농반 활동이 진행되고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눈빛이 달라졌다. 기순의 얼굴에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처럼 발견의 기쁨이 나타났다. 기순은 몇 주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농반 선배들과 어울리며 시위에 적극적이었고 수업에 빠지는 횟수가 늘어났다.

기순은 어떤 계기였는지, 자기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승연한테 털어놓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기순 자신과 승연은 본질적으로 물과 기름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함께 서울 시내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먹으며 수다 떨었던 기순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선 존재가 되었다. 미국 유학을 꿈꾸며 영어 공부에 매진했고 혼자 사는 삶을 꿈꾸었던 평범한 여대생이 아니었다. 승연을 일부러 피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가까워지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마치 갈 길이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농반 회원 중 비운동권인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연습이 끝나고 나면 하나의 절차처럼 진행되는 세미나에 모두 참여했다. 말이 세미나지 독서 클럽이나 다름없었다. 읽고 답하고 질문하고 성찰하기. 책 한 권을 주고 일주일에 세 번씩 세미나를 열었다.

승연은 적극 참여하지 않는 게 눈치 보였지만 그렇다고 농반 그 누구도 승연에게 세미나 참여를 강요하진 않았다. 어떤 날은 실천적 지식인의 역할을 두고, 어떤 날은 왜 사회주의여야 하는가, 또 다른 날은 한국의 기형적이고 왜곡된 자본주의 성장에 대해 발제·토론했다.

승연은 세미나가 시작되면 혼자 벌떡 일어나 그들과 헤어지는 게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공의나 변혁엔 관심 없는, 철없는 자본주의 신봉자로 치부되는 게 신경 쓰였다. 승연은 농반 회장이 추천한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민중과 사회’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객관적 실체로 존재했던 민중이,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고 주체적인 실천 세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저자 머리말이다.

“지식인은 비록 그의 과거 경험과 현재 생활의 어떤 부분이 철저한 피지배자의 특징과 다소 어긋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민중이라는 투철한 자의식을 갖고 있다. 통치 수단으로부터 소외를 가장 예리하게 느끼고 있는 대자적 민중은 자의식의 민중이고, 비판적 민중이고, 행동하는 민중, 민중이 지식인이다.”

민중이 헤게모니를 쥐면 세상이 변하며 지식인이 행동함으로써 헤게모니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민중, 의식화된 지식인이 대자적 민중이라면 자기가 민중이라는 자의식을 갖지 못하는 민중,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민중, 즉 행동하지 않는 승연은 즉자적 민중인 셈이었다. 민중과 지식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기순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10월 셋째 주 수요일, 오전부터 벌어진 시위가 점심때 소강상태였다가 오후 들어 다시 격렬해진 시점이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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