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오늘생각] ‘87년 체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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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17 00:02:55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 한 사회의 운명이 있고, 어떤 세대의 운명이 있고, 각인 각자의 운명이라는 게 있다.

1987년은 참으로 힘겨운 해였다. 1986년에서 198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각 학과 과대표들은 시위를 주도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1986년 3월부터 계속된 비밀조직의 검거 열풍으로 지하조직들이 무너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오픈’의 학생회 대표들이 역할을 떠맡은 것이었다.

고(故) 박종철은 필자의 지인이었다. 그때 필자는 4학년이 되면서 국문과 과대표가 되었고, 대학을 재수한 종철은 3학년에 올라가며 언어학과 과대표를 맡았다. 인문대학 과대표들은 종철의 하숙집에 자주 모였다. 거기서 시위를 위한 전단지가 각 학과 몫으로 배분되었다. 1986년 내내 계속된 NL계(주체사상파 운동권) ‘검거’로 노선이 다른 조직에서 시위가 조직되었다. 추정이지만 종철은 그쪽과 관련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필자는 종철이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쯤 아침에 신림9동 도림천 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필자는 학교에 가고 있었고, 종철은 겨울에 어울리지 않게 체육복 차림으로 버스 정류장 앞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 들고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이 종철을 본 마지막이었다.

1987년의 6월 혁명은 박종철 군의 죽음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그 겨울부터 여름까지는 참으로 길었다. 종철의 죽음으로 들끓는 분노 속에서 정권은 ‘호헌(護憲)’을 공언했다. 체육관식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한번 치르겠다는 것이었다. 항거하는 학생들은 무서운 공권력에 이리저리 내몰렸다. 이른바 ‘호헌 정국’이었다. 길고 절망적인 봄날이 흐르던 중 천주교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 미사에서 고문치사의 진상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이 발표된다. 그리고 이제 6월10일로 관심이 모아졌다. 그날 시민들이 일제히 궐기하기로 한 것이다.

6월10일은 일요일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십 분 시위하다가 해산당하고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 지레 짐작했다. 아니었다. 시청 앞에서부터 신세계백화점 앞까지 꽉 들어찬 시민과 학생들 앞에 드디어 공권력도 무너져 내렸다. 전투경찰대의 앞도, 뒤도, 옆도 사람들 물결이었다. 직장인들이 넥타이부대가 되어 시위에 합류했다. 빌딩 위에서는 시민들을 위한 흰 티슈들이 한 여름의 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로부터 6월29일까지, 직선제 개헌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집회·시위가 이어졌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시대가 이로써 열렸다.

이것이 바로 ‘87년 체제’다. 무엇보다 국민주권 체제다. 국민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 체제다. 급진적인 학생들은 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 급진적인 ‘민중 권력’, 사회주의로 연결될 ‘민중 혁명’을 원했다. 국민들은 이 구호와 목표를 수용하지 않았다. 급진파의 논법으로 보면 부르주아적 한계가 뻔한 직선제 개헌이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국민은 오로지 ‘직선제 개헌’ 쟁취만을 전국민적 목표로 수용했다.

국민들은 현명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이론적 모델이 정립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회주의라면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밖에는 현실의 모델을 삼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급진파의 ‘민중 혁명’은 자칫 이 전체주의로 가는 길목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관계를 논의한 어떤 논문을 접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유럽 각국은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고, 그 나라들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따라서 자유민주적 ‘사민주의’ 정당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자유민주적 선거를 통해 인준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유민주적으로 실현해 가는 사회주의란 어쩌면 ‘자유 사회주의’라 불려야 한다.

필자의 세대가 대학생들이었을 때, 온 국민이 거리에 나서서 쟁취한 ‘87년 체제’의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민 주권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다. 우리는 이 국민 주권의 원리를 지켜 내야 한다. 어떤 불의가 이 체제가 변질되도록 손질을 가하는 것을 더 이상은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생각한다. ‘87년 체제’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라 함은 이 체제가 민중의 더 많은 권력을 향한 ‘경쟁’에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경쟁’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국민 주권의 원리를 반영하는 투명한 선거다.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가슴 아픈 희생들로 얻어 낸 ‘우리’의 ‘87년 체제’는 이미 타락해 버린 것이다. 다시 국민들이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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