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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흔들리는 초가을, 박사학위를 받는 젊은이들이 학위수여식 단상에 선다. 부모와 교수, 동료들이 보내는 축하의 박수갈채 속에 환한 미소로 빛나는 그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자부심이 서려 있다. 하지만 그 화사한 순간이 끝나고 현실의 문이 열리면 그들 앞에는 취업 절벽이라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 통계가 보여주는 현실은 참혹하다. 지난해 국내 신규 박사학위 취득자 중 약 29.6%가 졸업 후 무직 상태이며 특히 30세 미만 박사층의 무직률은 47.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청년 실업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박사 백수’라는 표현이 공공연히 쓰이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배움의 길을 걷는 청년들의 모습은 마치 고대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과 닮아 있다. 높은 탑을 쌓아 하늘에 닿고자 했지만 정상에 도달한 순간 혼란과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듯 오늘날 박사 학위자들도 학문적 성취의 정상에서 취업 시장의 벽과 마주한다.
바벨탑의 건설자들은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며 거대한 꿈을 키웠다. 하지만 탑이 높아질수록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박사들도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고도로 특화된 언어를 익혔지만 정작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학문의 탑을 높이 쌓을수록 현실과는 더욱 멀어지는 역설적 상황에 놓인 것이다. 지식이 곧 자산이 되어야 할 시대에 배움이 오히려 짐이 되는 모순적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들의 처지는 조선 시대 사화에 휘말린 선비들을 연상시킨다. 유배지로 내몰린 것과 다름없는 ‘연구실 유배’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대학 강단과 국책 연구소에는 여전히 비정규직 일자리가 대다수를 차지하며 청년 박사들의 삶은 ‘노비문서 없는 지식 노예노동’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은 더욱 냉혹하다. ‘쉬는 청년’으로 집계된 인구가 50만 명을 넘어섰다. 취업 포털에 수십, 수백 번 원서를 넣고도 끝내 불합격 통보만 받다가 ‘쉬는 사람’으로 기록되는 청년들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또래와, 10년 가까이 대학원에서 연구에 몰두한 청년이 결국 같은 취업 절벽 앞에 선다는 사실은 잔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두뇌 유출 문제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국가가 지원하고 사회가 키운 박사 인력이 해외 연구소나 기업으로 빠져나가면서 국내는 연구 인재 공백 상태에 놓인다. 개인의 좌절이 곧 국가 경쟁력의 유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미봉책에 머물러 있다. 단기 지원금이나 일자리 수당으로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 청년 연구자가 산업 현장, 스타트업, 국책 프로젝트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구조적 플랫폼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학문과 산업, 연구와 경제가 따로 노는 현실에서는 아무리 많은 학위를 취득하고 실력을 쌓아도 ‘박사 백수’ 현상은 줄어들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가 고급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시스템적 한계에 있다. 대기업은 박사급 인력을 주로 연구 역량과 경력 중심의 공개 채용으로 선발하고 있으나 대규모 채용보다는 제한적으로 모집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은 박사급 인력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공공 부문은 경직된 채용 구조로 인해 유연한 인력 활용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우수한 인재들은 국내를 떠나거나 아예 연구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산업 구조와 연구 생태계의 근본적 전환이다. 대학과 기업, 정부 연구소를 잇는 유기적 네트워크가 마련되어야 한다. 박사급 인력이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연구개발(R&D) 투자와 함께 그 성과를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산업 인프라도 확충되어야 한다.
특히 정부는 단순한 일자리 창출을 넘어 박사급 인력이 사회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 연구소기업 확산, 기술사업화 지원 등을 통해 지식과 기술이 경제적 가치로 전환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밤새워 연구실 불빛을 지키던 청춘의 열정이 더 이상 ‘헛된 희망’으로 끝나선 안 된다. 학위의 끝에서 절벽을 만나는 청년이 아니라 새로운 길과 기회를 발견하는 청년으로 서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다. 청년들의 꿈이 현실이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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