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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책들이 모두 요약돼 담긴 책이 있다면? 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은 그 책이 있(다고 전해지)는 무한한 도서관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의 제목은 성경 속 바벨탑의 두 상징성을 탁월하게 압축한 것으로 읽혀서 흥미롭다. 한 상징성은 바벨탑이 절대 진리에 닿기를 희원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 분열을 표상하는 데에서 성립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 지식의 주된 표현 수단이 언어라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책이 聖者들의 지혜로운 ‘말씀’을 만화경처럼 다채롭게 펼치는 매체라는 점에서 “도서관은 상호텍스트성이 완벽하게 가시화된 현상, 즉 텍스트들이 서로 교차하는 실제 공간(민원정,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카발라신비주의’, 한국학술정보, 2007, 199쪽)”이다. 도서관은 분열된 인간 언어의 상징탑인 격이다.
이 유명한 소설을 간략히 읽으면서 글을 짓는 까닭은 영화 ‘브루탈리스트(2024)’도 무수한 울림들을 반향시키는 다형체로 보이는 점에 놓인다. ‘브루탈리스트’는 유대인 건축가 라슬로 토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유려하게 축조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욕망들과 그 영욕을 입체적으로 건설한 영화로 조감될 때, 그 인테리어 구조가 체계적으로 파악된다. 총체적 작업인 건축이 인간 욕망의 무궁무진함을 반영하면서도 확장한다고 보이거니와, 종합 예술인 영화 매체에서 ‘브루탈리스트’를 통해 그런 건축이 주된 이야기 재료로 사용된 것은 퍽 중대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이 영화는 자신의 골격과 경관을 아름답게 조화시키는 견고한 성취를 맺었다고 여겨진다.
영화의 구조물을 지탱하는 기둥은 크게 형이하학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열망으로 나뉠 수 있다. 전자는 인물의 육체에 물리적 작용을 가하는 양상에, 후자는 인간의 정신적 고양을 추동하는 양상에 연관된다. 양자는 대조되는 듯하나 긴밀한 상호 영향 관계를 이룬다. 인물들의 형이하학적 욕구는 생존과 쾌락을 향해 집중돼 있다. 다시 전자는 수용소 탈출과 물질 획득을 통해, 후자는 성욕 해소와 약물 남용을 통해 충족된다.
영화의 서곡은 수용 시설에서 소련군의 강압적 심문을 겪는 조피어의 상황으로 시작한다. 이 첫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유대인 수용소가 생존은 가능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는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수용소는 심신 양면에 걸친 진정한 ‘인간적’ 생존이 불가한 ‘죽음’의 장소다. 라슬로는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탈출해 자유로운 인생을 누리고자 미국행 배에 탑승한다. 그런 남편에게 아내 에르제베트가 보낸 편지가 내레이션되는 가운데, 자유롭다는 착각이야말로 가장 절망적인 노예 상태라는 괴테의 언명이 제시된다. 이 언명은 자신의 부자유를 깨달은 자가 절망적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속박으로부터 탈출해 자유를 되찾으려는 라슬로가 배에서 처음 본 건축물이 완전히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임은 인상적이다. 그가 누릴 자유가 타락한 자유임이 암시되기 때문이다. 이 역전된 아메리칸 드림의 이미지는 라슬로 역의 애드리언 브로디가 쌓아온 필모그래피를 참고할 때 더 묘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그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2002)’에서 유대계 피아니스트로 나왔었음을 기억하는가. 그 예술가의 곡진한 쇼팽 연주가 독일군 장교의 메마른 마음마저 흔들었음을 회상해 보면, 순결한 음악혼과 뒤틀린 건축욕 사이의 변별점도 마련할 수 있다.
영화는 서곡에서부터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자신의 시작 배경으로 자연스레 보여주는 데에 이어,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는 미국에서마저도 노숙인과 부랑자가 많았음을 묘사하고 있다. 식량을 받기 위해 수많은 빈자가 긴 줄을 이루고 있으며 대중교통 안에서 도움을 구걸하는 사내도 있다. 물질로서의 음식과 금전 모두 결핍된 가난의 현장에는 늘 라슬로가 있다.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에 못지않게 성욕을 풀고자 하는 굶주림도 어마어마하다. 막 도미해 가난하기 그지없을 라슬로가 도심에 들어가 처음 방문한 곳이 성매매 업소임은 성공과 미학을 추구하는 라슬로의 건축가적 야심 뒤편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그 음지에는 진솔한 인간적 성욕이 스며들어 있다. 한 남성과 두 여성이 나체로 성행위를 하는 흑백 영화가 토막토막 삽입되고, 라슬로 부부의 관계 장면이 여러 번 조명된다. 심지어 무력해진 라슬로가 어둠 속에서 해리슨에게서 성폭행당하는 음험한 사건까지도.
고통이 없는 상태도 일종의 쾌락이라면, 라슬로의 약물 중독도 진통 효과를 통한 쾌락의 맥락에서 분석될 수 있겠다. 진통제 남용의 의미 맥락은 더 확장될 여지가 있다. 한밤중에 격심한 통증을 겪는 에르제베트에게 마약류 진통제를 투여하는 라슬로의 행동은 정당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당한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관계될 수 있다. 마약은 인간에게 어떤 절대화된 쾌락을 준다. 신은 절대적 眞善美의 표상이다. 그런 점에서 마약은 유한한 인간 육체와 무한한 신적 영성을 매개하는 금단의 열매라 명명될 만하다.
영화 속 인물들의 형이상학적 열망은 건물과 종교를 통해 실현되려는 격동을 보인다. 복합 문화 센터의 건립은 라슬로의 건축적 이상과 해리슨의 사업적 이상이 걸린 일대사다. 그 두 이상 모두 새롭고도 정치한 미적 구조물을 요구한다. 그러한 국면에서 라슬로는 브루탈리즘 양식을 완성함으로써 차갑고 건조한 물성을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정치적 박해의 잔인한 중압감에 시달렸던 한 유대인의 잔혹한(brutal) 야심이 잔혹하도록 아름다운 성취를 건립한 영예의 순간이다.
그 눈부신 순간의 중심에 아로새겨지는 것은 빛의 십자가다. 십자가는 사랑과 영광의 상징으로 많이 활용되지만, 본래는 예수에게 언도된 참혹한 형벌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암담한 고통을 거치고서 만인의 죄악을 대속하는 신성한 임무를 다 이루었음을 떠올릴 때, 영화 속 십자가가 그림자와의 대조 속에서 빛나고 있음은 이 작품의 일면을 적확히 이미지화한 것으로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는 목표와 수단의 괴리가 빈번히 관찰된다. 아내를 두고 매춘업소를 이용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는가, 아픔을 달래려고 마약에 손대는 것은 허가될 수 있는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 외의 일체를 희생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가.
확답이 어려운 질문들이 메아리치는 중, 노쇠해진 라슬로를 대신해 조피어가 하는 말은 그래서 일방적 주장보다는 질문에 가깝게 들린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이지 과정이 아니다.’ 이 말은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고 목적지로 질주해 갔던 라슬로가 스스로를 애써 위로하는 말로 새겨진다. 그 자위의 말은 관객들에게 질문으로 바뀌어 들릴 터이다. ‘중요한 목적은 불순한 과정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관객들의 심중에서 저마다의 울림으로 축조돼 가리라. 바벨탑은 그렇게 다시 지어지기 시작한다.
영화 ‘브루탈리스트(2024)’ 줄거리
(1) 서곡 유대인 건축가 라슬로 토트는 아내 에르제베트를 뒤로하고, 유대인 수용소를 탈출해 미국행 배에 탄다. 라슬로는 도미에 성공한다.
(2) PART 1: 도착의 수수께끼(1947~1952)
라슬로는 미국에서 사촌 어틸러와 재회하고, 그에게서 에르제베트와 조카 조피어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는다. 라슬로가 세계 대전의 역사적 상처를 견디며 힘들게 사는 중, 서재를 리모델링한 그의 건축 재능을 알아본 재벌 사업가 해리슨이 그런 그에게 복합 문화 센터의 설계를 제안한다.
(3) PART 2: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1953~1960)
라슬로는 조피어와 에르제베트를 다시 만난다. 라슬로가 건축을 집착적으로 주도하는 과정에서 참여자들의 반대와 해리슨의 압박으로 난항을 겪던 중, 자재를 운반하던 기차가 사고를 당해서 공사가 중단될 뻔하나, 라슬로와 해리슨이 현지에 직접 가 그 자재를 구해오는 노력으로 공사가 완성된다.
(4) 에필로그: 제1회 건축 비엔날레(1980)
노약한 라슬로를 대신해 조피어가 브루탈리즘 양식에 깃든 라슬로의 건축 철학을 발표한다. 영화는 라슬로가 조피어에게 들려주었다던 말, ‘중요한 것은 목적지이지 과정이 아니다’를 던지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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