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러시 시대 진짜 승자는 금을 캔 사람이 아니라 삽과 곡괭이를 판 사람이었다.”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는 현대 산업사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사례다. 당시 일확천금을 노린 수많은 이들이 금광으로 몰려들었지만 가장 큰 부를 거머쥔 사람들은 광부가 아니었다. 광부들에게 삽과 곡괭이, 작업복과 천막을 공급한 사업가들이었다.
인공지능(AI)이 세계 산업 지형을 바꾸고 있는 지금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시장의 관심은 화려한 AI 서비스와 글로벌 플랫폼 기업에 집중되고 있지만 정작 AI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고성능 반도체와 첨단 기판, 전력 공급 부품, 패키징 기술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AI 시대 새로운 골드러시에서 ‘삽과 곡괭이’를 공급하는 기업 중 하나가 바로 삼성전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장덕현 대표이사 사장이 있다.
장 사장이 선택한 공간 역시 그의 경영 철학과 결을 같이 한다. 서울 용산구 소재 최고급 주거단지 나인원한남과 경기도 양평의 남한강변 토지. 얼핏 전혀 다른 성격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두 곳에는 공통점이 있다. 과시적 외형보다는 삶의 질과 안정성 그리고 자연 친화적 환경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산업 판세를 읽는 기술형 리더
1964년생인 장 사장은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용문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1986년 졸업한 뒤 1988년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1997년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정통 엔지니어다.
삼성전자 입사 후 메모리사업부 솔루션개발실장, 시스템LSI사업부 LSI개발실장과 SoC개발실장, 부품플랫폼사업팀장, 센서사업팀장 등을 거치며 반도체와 부품 기술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다. 삼성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기술통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삼성전기 대표이사에 오른 것은 2022년이다. 당시 시장은 스마트폰 성장 둔화와 IT 경기 침체를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 사장은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AI와 데이터센터, 자율주행차, 전장 산업 확대가 전자부품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릴 것이라 판단했다.
고부가 부품 승부수
그는 취임 이후 줄곧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의 사업구조 전환”을 강조해 왔다. 그 결과 삼성전기는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연매출 11조 원을 돌파했다. 특히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와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를 양대 성장축으로 삼아 AI 시대 핵심 부품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MLCC는 전기를 저장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전자산업의 필수 부품이다. 스마트폰 한 대에만 1000개 이상 들어간다고 한다. FC-BGA는 AI 서버와 GPU, 고성능 반도체를 기판과 연결하는 첨단 패키지 기판이다.
AI 산업이 성장할수록 이들 부품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AI 서버 한 대에는 일반 서버보다 훨씬 많은 MLCC가 필요하며 고성능 AI 반도체 구현에는 첨단 FC-BGA가 필수다. 즉, AI 산업 확장은 삼성전기 성장과 직결된다.
삼성전기가 지난달 20일 공시한 글로벌 고객사와 체결한 1조5000억 원 규모의 AI 서버용 실리콘 캐패시터 공급 계약도 같은 맥락이다.
실리콘 캐패시터는 일종의 콘덴서로 AI 서버용 GPU와 HBM의 전력 안정성을 책임지는 핵심 부품이다. 이 부품은 전자회로 안에서 전기를 잠시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는 미니 충전지(댐) 역할을 한다.
장 사장의 경영 철학은 자사주 투자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대표 취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삼성전기 주식 6000주를 장내 매수했다. 총 투자금은 약 9억 원 규모다. 회사의 성장 가능성을 확신한 최고경영자가 책임경영의 의지를 직접 보여준 셈이다.
이 과감한 베팅은 최근 삼성전기가 AI·전장 부품 시장을 주도하며 주가가 폭등함에 따라 큰 결실로 돌아왔다. 5일 종가 기준(175만7000원)으로 장 사장이 보유한 삼성전기 주식 가치는 105억 원을 돌파했다. 삼성전기 시가총액 역시 131조 원대를 기록하며 코스피 시총 6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장 사장은 지난해 실적 성장을 견인한 공로로 삼성전기로부터 급여 9억6700만 원, 상여 5억9900만 원 등 총 16억9300만 원을 보수로 받았다. 기술과 경영 능력을 입증한 그는 올 4월 서울대 공과대학이 선정하는 ‘2026 자랑스러운 공대 동문’에 이름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한남동과 양평
장 사장의 성향은 그가 거주하는 나인원한남에서도 확인된다.
총 부지 면적은 약 6만㎡에 달한다. 단지는 지하 4층~지상 9층 규모 9개 동으로 구성됐으며 총 341가구가 입주해 있다. 서울 초고층 아파트들이 수백 미터 높이를 경쟁하는 것과 달리 나인원한남은 남산 경관 보호를 위한 고도제한(최고 9층) 규제를 반영해 저층·저밀도 단지로 조성됐다.
덕분에 단지 내부는 마치 대형 리조트나 공원에 들어온 듯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한 넓은 녹지와 산책로, 철저한 보안 시스템으로 프라이빗한 주거 환경이 강점이다. 장 사장은 2021년 3월 전용면적 206.89㎡(약 62.6평) 규모 세대를 42억5000만 원에 취득했다. 2025년 4월 동일 면적의 거래가격이 130억 원 안팎까지 오르면서 자산 가치도 크게 상승했다.
흥미로운 점은 장 사장이 서울의 나인원한남뿐 아니라 경기도 양평에 수백평 규모의 토지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양평에서도 손꼽히는 남한강 뷰를 자랑한다. 강과 산, 조용한 시골 마을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도시의 소음은 멀어지고 자연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남동과 양평. 하나는 서울 최고급 도심 주거단지이고 다른 하나는 수려한 자연 속 공간에 위치해 있다. 두 공간은 공통점이 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삶의 질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자신이 선택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이는 장 사장의 경영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시장이 AI 서비스와 플랫폼 경쟁에 주목할 때 그는 전력 공급과 기판, 캐패시터, 패키징 기술을 바라본다. 완제품보다 인프라를, 유행보다 기반 기술을 중시한다. 삼성전기가 최근 AI 서버용 실리콘 캐패시터와 FC-BGA, 초고용량 MLCC, 유리기판 등 미래 사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시대 진짜 경쟁력은 눈에 보이는 서비스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반 기술에서 나온다는 안목이 깔려있다.
장 사장의 삶과 주거 공간은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가장 화려한 곳이 아니라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서울 한남동의 조용한 저층 단지와 남한강을 품은 토지는 그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보여준다.
높이보다 깊이를, 유행보다 구조를, 현상보다 토대를 중시하는 남다른 사고방식. AI 시대 새로운 골드러시에서 삼성전기가 ‘삽과 곡괭이’를 만드는 기업으로 주목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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