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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흔적 없이 사라진 최초의 국립현충원 장충단
제한제국 때인 1901년 초혼제가 열던 국가적 추모 장소
안중근이 저격한 이등박문 기리는 일본 절 세워지기도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12-14 11:50:11
 
1900년 5월 광무제의 지시로 동년 11월 10일 남산 기슭에 장충단(奬忠壇)이 완공되기에 이른다. 장충단은 3층 기단 위에 세워진 제단을 비롯해 꽤 많은 시설과 부속건물들이 있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건축물이므로 화려한 단청을 하지 않았고, 대한제국기를 4면에 꽂아 국립현충원으로서의 위용을 갖추었다. 1901년 4월22일 황성신문에 장충단에서 초혼제가 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장충단은 이처럼 국가적인 추모 장소였으나 실질적으로 국권을 빼앗긴 을사늑약 이후에는 일본군과 관공서의 운동회나 야유회 장소로 변질되고 말았다. 1908년 5월 8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한 일본군 사단장이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초청해 장충단에서 야유회를 가졌는데 일본인 관료들과 한국의 군부대신 권중현 등이 내왕했다는 소식이 실리기도 했다.
일제는 1908년부터 장충단에 올리는 제사를 금지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이토 사망 이전에 이미 이토의 동상을 장충단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초대 조선통감 이등박문의 장례식 추도회가 1909년 11월4일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추모공간이었던 장충단에서 열렸다.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사살은 당시 정국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안중근이 일제 검찰의 신문에 “이완용은 망국적 큰 괴수로서 이토에게 자신의 직무를 팔아넘겼다”라고 비판한 이후 다음 표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완용과 친일파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한일합방을 추진했다.
친일파들은 내각 차원에서 이등박문을 위한 성대한 추도식과 장례식을 준비했다. 국·공립학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해 추도회장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친위부의 보병 2개 중대를 대기시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순종은 애도사에서‘吾國의 兇手에게 死’, 즉 우리나라의 악당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을 쓰며 애통해 했다. 또한 친일파들은 광무 황제에게 통감관저에 마련된 빈소에 직접 조문할 것을 종용하니 처음엔 이를 거부했다가 곧 수락하고 만다. 결국 11월2일 통감관저로 가서 자신의 외교권과 황위를 빼앗아 간 이토의 죽음을 애도했다.
경술국치 이후 장충단의 국가 제사는 중지되었고 운동회 장소로 사용되기는 했으나 그나마 원래의 형태는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후 사전(祀典)과 부속건물들이 폐쇄됐고, 장충단임을 알려 주던 비석마저 뽑혀 숲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장충단의 해체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1919년 경성부는 장충단을 동대문 부근의 훈련원 터와 함께 공원 조성대상지로 선정해 벚나무 수 천 그루를 심고 광장·연못·어린이놀이터·다리 등을 시설해 1921년 공원으로 개장했다. 1926년 4월엔 전차선로를 장충단공원까지 연장해 ‘장충단선’으로 개통했으며, 상해사변 때 결사대로 죽은 일본군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웠다.
 
▲ 이토 히로부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장충단에 세워진 박문사. [필자 제공]
 
1929년에서 1931년 사이 공원 동쪽 4만 평의 숲을 파헤쳐 조선의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이등박문의 영혼을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라는 일본식 절을 지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와 재한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토의 공적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있어 동상을 건립하자는 제안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다가 사망 20주년이던 1929년 말 동상 건립보다는 명복을 비는 불교 사찰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으로 논의가 구체화되었다. 사찰의 명칭은 이토의 이름을 따서 박문사(博文寺)로 정했으며, 사찰명 앞 산 이름은 이토의 아호 춘묘(春畝)를 써서 출묘산이 되었다. 절의 정식 명칭은 ‘춘묘산 박문사'였다. 종파는 이토가 생전에 귀의한 조동종(曹洞宗)으로 정해졌다.
박문사 건립을 위한 기부금 목표액은 조선 20만 엔, 일본과 만주 15만 엔으로 총 35만 엔이었다가 그후 40만 엔으로 증액됐다. 총독부는 20만 엔 중 8만 엔을 조선 각도에 할당했다. 함경남도 관리들은 월급의 0.5~1%를 내야 하는 강제적인 모금이었다. 일본에선 미츠이(三井) 같은 재벌이 거액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신청했다.
일제는 박문사 건립의 후보지로 삼청동·사직단·장충단·통감관저 등을 선정했다. 그중 장충단이 남산을 배경으로 넓은 광장을 확보할 수 있고 자동차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이유로 최종 확정되었고, 설계는 일본식과 현대식을 결합한 혼합식으로 하기로 했다.
공사는 오쿠라쿠미(大倉組)토목(주)에서 낙찰받아 1931년 6월5일에 공사에 착수해 1932년 10월26일에 낙성식이 실시됐다. 박문사는 약 4만2000평 부지에 본당은 조선식을 가미한 철근 콘크리트의 2층 건물로 건축면적 약 400평, 높이 약 13m였으며 부속건물을 합쳐 전체 건축면적이 약 500평에 이르는 큰 사찰이었다.
 
▲경복궁의 선원전을 뜯어와 지은 쿠리(주지 방, 창고). [필자 제공]
일제는 박문사를 세우면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경복궁의 선원전(璿源殿)과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을 뜯어와 사용했다. 정문 옆 돌담은 광화문을 허문 뒤 그 석재를 가져다 사용했으며, 특히 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의 부속 건축물인 석고각을 이축해 박문사의 종각으로 세웠다.
그러나 완공 후에는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도 이 절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박문사 측은 1930년대 중반부터 절을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로 만들기도 했다. 이후 이곳에서 조선총독부에 근무한 일본인이나 박영효 등 친일파의 장례식이 열렸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위령제도 거행되었다.
그러던 중 1945년 해방의 날이 왔다. 박문사는 어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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