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위증범은 처벌… 위증교사자는 ‘무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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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정치전문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1-29 00:02:40

1997년 12월 북미 전역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터졌다. 미국 국방부 공보직이었던 린다 트립이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지퍼 게이트’를 폭로한 것이었다.

트립은 1994년 국방부 취업 후 르윈스키와 친분을 쌓았다. 르윈스키는 트립과의 통화에서 클린턴과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을 털어놨다. 이를 녹음한 트립은 언론에 공개했다. 트립 등에 의하면 클린턴은 50세였던 1995년부터 22세의 르윈스키와 불륜에 빠졌다. 기혼남 대통령이 딸 뻘의 여성과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은 클린턴의 도덕성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안겼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가장 문제가 된 건 간통 자체가 아닌 ‘위증교사’였다. 법정에 선 클린턴이 스스로 위증했음은 물론 르윈스키에게도 위증을 요구했다는 의혹이었다.

지퍼 게이트가 처음 터졌을 때 클린턴·르윈스키는 입 모아 부적절한 관계를 부인했다. 추문이 있었음에도 클린턴 지지율은 과반을 넘을 정도로 공고했다. 그러나 당국은 오로지 적법한 절차만 따랐다.

특검팀은 르윈스키의 드레스에 묻은 체액이 클린턴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을 동원해 백악관에서 클린턴의 혈액을 채취했다. 한편으로는 르윈스키에게 증거를 제시하며 연방대배심에서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을 경우 위증죄로 기소하겠다고 경고했다. 르윈스키는 기존 증언을 번복하고 클린턴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인정했다. 설상가상 클린턴의 절친한 친구였던 버논 조단 변호사는 르윈스키에 대한 국방부와 화장품 대기업 레브론 일자리 알선 사실을 시인했다.

케네스 스타 특검은 보고서에 “클린턴은 르윈스키가 (지퍼 게이트) 증인 명단에 오르자 (위증을 교사하고 그 대가로) 그녀가 원하는 곳에 취직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고 적시했다. 궁지에 몰린 클린턴에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끝내 연방대배심 등에서 혐의를 인정했다.

특검팀은 1998년 9월 클린턴이 11개 항의 탄핵 사유에 해당한다는 특별보고서를 하원에 제출했다. 동년 10월8일 탄핵 절차를 개시한 하원은 12월12·13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위증·사법 방해·권력남용 등 4개 혐의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또 동월 19일 본회의에서 위증·사법 방해 혐의로 미 헌정사상 두 번째로 현직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은 간발의 차로 11월3일 중간선거에서 승리했다. 클린턴은 1999년 2월 상원에서의 탄핵안 부결 등으로 극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형사기소를 피했다. 하지만 민심의 심판을 피하진 못했다. 클린턴은 대국민 사과 후 친딸과 상당수 국민에게 괴물 취급을 당했다. 민주당도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에게 백악관을 내줬다.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 김동현) 심리로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위증교사 혐의 사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반면 위증교사 정범으로 기소된 고(故) 김병량 전 성남시장 비서 출신인 김모 씨에게는 벌금 500만 원이 선고됐다.

‘얘기해 주면 딱 제일 좋죠’라는 취지의 이 대표·김씨 통화 녹취록 공개가 무색한 판결에 여권에선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논리처럼 “얘기해 달라 했지만 위증교사한 건 아니다. 위증범이 아무 외압 없이 자발적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위증했다고 인정했다”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법원 판결 배경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쏟아진다. 민주당은 당연한 결과라는 입장이다. 반면 국민의힘에선 ‘판사 탄핵’ 등을 부르짖은 민주당과 강성 지지층의 소위 ‘떼법’ 앞에 법원이 백기를 든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6월 녹취록을 공개했던 박정훈 의원은 “위증교사 죄목을 아예 형법에서 없애라”며 분개했다.

‘떼법’에 의해 자리를 지켰으나 이에 분노한 선거인단 등에 의해 철퇴가 가해진 클린턴·민주당 유사 사례가 재현될 것이란 목소리도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판사 한 사람에게 모가지 걸어서 되겠나. 퇴출은 국민 손으로 해야지”라고 했다. 나경원 의원은 “이 대표·민주당의 경거망동을 국민이 용납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곽규택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항소심에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번 1심 선고가 불러올 나비효과가 주목된다.

오주한 정치전문기자 jhoh@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