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해 한용운의 소설을 읽는 작업. 정신이 흐트러져서인가, 많이 더디다. ‘박명’을 겨우 마치고 이제 미완성 소설 ‘죽음’에 이르렀다.
‘박명’의 순영은 잊었던 사랑의 방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잊었다기보다 이미 믿어져 익숙해진 것이다. 익숙한 것은 잊혀진다.
순영은 강원도 인제 산골 소녀였다. 사나운 계모 아래서 막일에 시달리며 성장하다, 서울에 가자는 꼬임에 넘어가 남자들을 위해 팔리는 여자의 삶을 살게 된다. 고단한 생활을 피하려다 타락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 시대에는 서울 가려면 속초로 넘어가 대포항 같은 데서 배로 원산으로 가 경원선을 타야 했다.
원산에 닿아 육지로 옮겨주는 ‘종선’으로 옮겨타다 물에 빠져버린 순영을 그때 구해 준 이가 있었고, 순영이 인천으로 팔려가 우연히도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항상 자기를 구해준 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던 순영이다.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의 관계가 순조롭게 풀려 순영은 금광업을 꿈꾼다는 그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김대철의 본색은 제대로 된 금광업자도 아니요, 심성도 바르지 않다. 아이를 하나 낳고 살았건만 외지로만 떠돌던 대철은 다른 돈 많은 여자가 있노라고 이혼을 요구하고, 이혼당한 순영은 아이까지 병들어 죽어 그만 혼자 몸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인연이 풀어지고 말았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모진 인연은 순영으로 하여금 아편쟁이로 전락해 버린 대철을 다시 만나게 하고 그가 삶을 마칠 때까지 삯바느질에 동냥까지 하며 보살피게 한다.
이러한 순영의 이야기가 서울 장안에 널리 퍼지니, 사직공원을 지나던 ‘신여성’ 여학생들이 순영을 항해 손가락질을 한다. 어째서 저렇듯 자기 신세를 망쳐놓은 남자를 끝끝내 보살펴 뭇 여성들을 낡은 사상의 노예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순영의 존재가 여성해방을 향해 나아가야 할 여성들의 의식을 과거의 구습에 얽매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이 대목에 이르렀을 즈음, 화자의 목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 내용은 이광수의 소설 ‘사랑’에서 울리던 생각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주인공 ‘안빈’이 말하기를, 석가모니가 이 현세에 나기 전에, 세상에 나고 죽고 하기를 수없이 거듭했는데, 그때마다, 그러니까 한 생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구하기를 거듭거듭하여 그 공덕으로 마침내 현세의 부처가 되실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해가 ‘박명’에서 그린 순영의 삶이, 바로 그렇게 한 생에 오로지 한 사람만을 구하는 삶이었다고 생각된다. 심지어 그 대철은 선의에서 물에 빠진 순영을 구해 준 것도 아니요, 서로들 못 본 체하는 사람들 속에서, 저 아이를 구해 주는 이에게 큰돈을 주겠노라 한 함경도 정평 땅 환희사의 비구니 스님 정공의 발원에 따른 것이었다.
이광수 소설 ‘사랑’에 관한 논문을 쓰며 생각한 것이 있었다. 사람들은 제도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는 행위를 하는 것이, 심지어는 정치적 권력을 이동시키는 투쟁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사랑’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들 한다. 많은 경우 그것은 자신의 냉정과 위선을 가리는 명분일 뿐이다. 그런 것을 너무 많은 곳에서 보아 왔다. ‘박명’한 이의 지극한 ‘사랑’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고귀하더란 말인가.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