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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의 지구촌 IN & OUT
“정치인 말씀은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요즘 세상엔 ‘Easy Read’ 열풍이 불건만
정치인은 진실 감추려는 거짓 언어 남발
이혁재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1-13 11:38:56
 
▲ 이혁재 수석 논설위원
기자 초년병 시절 이렇게 교육받았다. 
 
“할아버님한테 설명 드리듯 기사를 쉽게, 친절하게 써라.” 
 
입사 후 10여 년이 지나 대전에 있는 대덕 연구단지를 취재할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연구단지에서 만난 한 세계적인 수학자는 “모두가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어요. 과학자 병아리 가운데 과학을 대중에게 쉽게 설명해 줄 사람도 필요합니다”고 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기사 쓰기가 어려운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기자의 글 솜씨가 떨어져서. 둘째 기자가 그 사안을 제대로 이해 못 해서.
 
요즘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문학계에서 법원에 이르기까지 쉬운 글, 이른바 ‘Easy Read’가 유행한다는 뉴스였다. 이해는 눈높이를 맞추는 데서 시작된다는 기치 아래 시작된 운동이다. 난해하고 불친절하며, 그래서 기피하게 되는 현대미술계가 앞장서 이 운동에 동참하며 친절하게 변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미국 작가 키키 스미스(68) 국내전이 좋은 사례다. 스미스의 1990년작 ‘무제’(머리카락)에 대한 원래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스미스는 고무로 자신의 머리와 목을 본뜬 캐스트를 만들고 여기에 잉크를 묻혀 석판에 찍어 냈다… 3차원의 대상을 재현할 때 윤곽을 따라 그리고 그대로 찍어내거나 사진을 촬영하는 등 주로 지표성을 활용하여 작업하는 제스퍼 존스의 작업과도 비교할 수 있다.” 몹시 전문적이고 난해한 해설이다.
 
이것이 Easy Read 작업을 거치니 쉽게 변했다. “이 작품은 머리카락을 판화로 표현한 것이다. 스미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복사기로 인쇄해 판화로 만들었다… 자신의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한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중학생도 스트레스 받지 않을 설명문이다. 일반 시민 등 33명이 참여한 워크숍을 진행해 7편의 쉬운 해설을 마련했고, 발달장애인 4명의 감수를 거쳤다고 한다. ‘모두를 위한 해설’ 덕분인지 개막 보름 만에 1만5000여 명이 전시장을 찾았다.
 
정보에도 취약 계층이 존재하고, 취약 계층에게 친절히 설명하면 세상이 다채로워진다는 생각에 ‘쉬운 글’은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그래서 영어로 된 카페 메뉴판·복잡한 코로나 자가 진단 키트 사용 안내서에도 속속 ‘Easy Read’가 도입되고 있다.
 
최근 법원 판결문에도 ‘Easy Read’가 도입됐다. ‘장애인 일자리 사업 불합격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한 청각장애인 A씨가 “알기 쉽게 판결문을 써 달라”고 하자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그래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판결문 표현을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고 고쳤다. 이해를 돕는 그림까지 첨부했다. A씨는 소송에서 졌지만 알 권리는 챙겼다. 올해 대통령 선거 및 지방선거에도 ‘Easy Read’가 쓰였다. 중앙선관위가 공보물에 자주 등장하는 공약의 표현을 순화하고, 보조 자료를 만들어 투표 방법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여기까지 읽으면 눈치 빠르신 독자분들은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 정치는 죽어라 ‘Easy Read’와 거꾸로 간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government engagement)가 바로 레귤레이션(regulation)입니다. 마켓(market)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 할 거냐, 마켓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그 마켓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중략) 2023년에는 그야말로 다시 대한민국, 도약하는 그런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더 아주 어그레시브(aggressive)하게 뛰어 봅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영어 테스트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한 수 위다. “시리어스(serious)한 논의도 별로 못 했어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커넥티드니스(connectedness) 이런 것과 연계돼서…” 등등. 하버드대에서 석·박사를 하고, 이명박정부 때 주미 대사를 지내 영어가 유창하다.
 
두 사람보다 야당은 몇 수 더 위다. 쓰는 단어는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그런데 그들이 한 말의 내용에 대해서는 시간이 흘러도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국내 원전 문을 닫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체코를 방문해 “한국은 지난 40년간 원전을 운영하면서 단 한 건도 사고가 없었다”고 자랑하던 심리는 두고두고 이해가 안 된다.
 
이재명 대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다”고, 박홍근 원내대표는 "야당 대표 소환은 헌정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매우 시적이고 정권에 대한 적개심이 절로 생긴다. 하지만 좀 이상하다. 이 대표는 한 점 대신 ‘여러 점’의 의혹을 받고 있다. 박 원내대표 말과 달리 노무현·이명박·박근혜도 소환받았고, 이들은 당 대표를 넘어 전직 대통령이었다. 아니, 당 대표격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무시하자는 건가.
 
비비 꼬아서 어렵게 얘기하는 건, 국민이 자신들의 거짓말을 알아채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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