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처럼 일하고.... 신처럼 창조한다.”
도대체 얼마나 멋지고 격렬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에 이렇게 감동적인 묘비명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주인공은 바로 조각의 거장 문신(1923-95)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SF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 생명체 비슷해서 기묘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추상조각의 거장 문신, 그의 예술 세계 못지않게 드라마 같은 삶 또한 감동적이다. 그의 예술혼이 서려 있고, 그의 생애와 철학을 투영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속된 말로 ‘갈아 넣어’ 만들었다는 ‘문신미술관’. 마침 기회가 되어 창원시 마산에 있는 창원시립 문신미술관에 다녀왔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야 작년 말 덕수궁 미술관에서 탄신 백 주년 기념전이 성황리에 열렸던 터라, 그보다는 미술관에 대한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싶었다. 14년간 손수 일군 미술관을 둘러보면 이 묘비명이 수사에 그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지난 2010년 이래 우리 근·현대 미술사의 레전드라 불릴 만한 걸출한 거장들 가운데 탄신 백 주년을 맞은 작가들이 부쩍 늘었다. 남관(1911)·장우성(1912)·김기창(1913)·김환기(1913)·박수근(1914)·장리석(1916)·이중섭(1916)·유영국(1916)·황유엽(1916)·장욱진(1917)·김흥수(1919) 등이 1910년대 출생 작가들이다. 그 뒤를 이어 1920년대 출생 작가로는 이대원(1921)·권진규(1922)·문신(1922)·홍종명(1922)·천경자(1924)·김찬식(1926)·변시지(1926) 등이 있다. 이렇게 많은 거목들이 타계하면서 거의 대부분 작가 이름을 딴 미술관들이 시도되었거나, 지금도 어떤 형태로든 기념미술관이 존립해 있다. 하지만 열망과 소신으로 사재를 털어 설립한 개인미술관은 드물다. 개인미술관은 문신미술관을 필두로 이어졌지만, 지금까지 순수한 개인미술관으로 남아 있는 것은 정말이지 드물다. 작품을 팔 수 있다면 재정에 보탬이 되겠지만 제도적으로 쉽지 않을 뿐더러 가능하다 해도 한정된 것이고, 기껏 해야 가능한 것이 저작권 프로모션 정도겠지만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밖에도 우리 미술을 빛낸 작가들을 기리고 그들의 작품 보존과 기획·연구 등의 작업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공공미술관에서 수행되어야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기의 이름이 들어간 기념미술관을 갖게 될 때 그것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문에도 영광일 것이다. 우리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기념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을 생각지도 못할 때, 문신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라도 반드시 미술관 건립을 성취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어려웠던 시절 자신을 예술가로 키워준 고향을 위해 전 재산과 열정을 바쳐 미술관을 설립해서 기증한다면 언젠가는 예술적 업적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뜨거운 애향심까지 헤아려 나머지 부분은 지역사회가 채워줄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말이 쉽지 미술관을 설립하는 순간 사실상 모든 권리를 내려놓아야 하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더욱이 유족들도 많은데 모두가 그 뜻을 이해하고 흔쾌히 협력해야 가능한 일이다. 돈만 많으면 다 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미술을 사랑해야 하고,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신과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 등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고향 마산이 훌륭한 문인과 예술인들을 배출한 곳이지만 번듯한 미술관 하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작가 문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가 유럽 무대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는 동안 가장 부러웠던 것이 가는 곳마다에 유수의 미술관들이 즐비하다는 점이었다. 작업도 작업이지만 미술관 공사를 서둘러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 아무튼 대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80년부터 마산항이 보이는 전망 좋은 추산공원 자락의 부지 2천여 평에 미술관을 짓기 시작, 무려 14년 후인 1994년 ‘문신미술관’이 개관됐다. 미술관 부지는 10대 때 일본으로 밀항, 미술공부를 하면서도 열심히 일하여 번 돈으로 마련한 땅으로 알려져 있다. 천신만고 끝에 미술관이 개관되었을 때 감회가 어땠을까. 기본 구상·건축·조경·옹벽·바닥 타일·외벽의 벽화·계단 그 어느 것 하나 작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옹벽이나 폭포 등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져 있다. 알고 보면 다재다능한 팔방미인답다 싶지만 생활 전선에서 안 해 본 일이 없다는 그의 이력을 보면 대체로 수긍이 간다. 처음엔 회화를 전공했던 그가 조각을 하게 된 것도 고성 성곽 등의 건축일을 하면서 얻은 자신감과 경험에 기인한다. 그의 묘비명에서 ‘노예처럼 일했다’는 표현이 바로 14년간의 노역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물론 평생 생활하고 창작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말한 것이었겠지만, 미술관 설립을 위해 몸소 강도 높은 노역에 나서야 했던 상황을 반추한 표현으로도 읽힌다.
문신미술관은 1994년 개관을 했고, 다음 해에 작가는 타계했다. 작가의 서거가 미술관 설립에 따른 마음고생·몸 고생 등과 무관하다고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을 열면서 이미 작가는 자기의 목숨과 맞바꿔 세운 미술관을 고향에 바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예술 여정의 마지막 퍼즐이라 생각했다. 그 결과 2003년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시에 기증이 되었고, 다음 해에 ‘창원시립’으로 새 출발, 시민들의 가슴속에 간직되는 미술관이 된 것이다. 문신미술관은 현재 지명도는 물론 각종 하드웨어·콘텐츠·운영, 그리고 시민의 사랑과 관심 등의 측면에서 가장 모범적인 기념 미술관으로 기록돼 있다. 문신미술관이 있어 창원은 명실공히 예향, 예술도시로서의 면모와 함께 공업과 예술이 조화로운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각 도시마다 지역 연고가 있는 유명 예술인을 유치하려는 움직임들이 많다. 하지만 매칭이 잘되는 경우는 아직 많지 않다. 지명도나 작품 등의 조건도 중요하지만 지자체의 재정 여건과 시민여론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신미술관처럼 자산과 작품·권위·지역의 우호적 여론 등의 여건이 갖추어진 경우가 많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력 투입과 지속적인 재정 투입 등이 광역시 이상의 규모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다. ‘문신’과 ‘창원’ 모두가 윈윈, 나아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이다. 생전에 작가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다 한다. 자기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필자가 볼 땐 작가만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창원이라는 도시도 꽤나 운이 좋은 도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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