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있다면 한국에는 이율곡(1537~1584)의 군주론이 있다고 한다. 이런 비유에 걸맞게 이율곡은 군주의 통치와 관련된 여러 저작들을 남겼는데 당시의 임금인 선조에게 올린 ‘성학집요’(1575년)가 대표적이다.
이 책에는 이율곡 스스로 “정력을 여기에 다 쏟았다”고 밝힐 정도로 방대한 내용이 들어 있지만 가장 핵심은 이것이다. “제왕의 학문은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제왕의 정치는 정성을 다하여 현명한 이를 등용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게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기질’은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통치자의 스타일’일 터이고 ‘현명한 이를 등용하는 것’은 ‘인사’(人事)라고 볼 수 있다. 시대와 체제는 확연히 다르지만 이 두 가지의 중요성 면에서는 오늘날의 정치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정부의 국정 운영이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외부 요인은 미뤄 두고 내부 요인을 따져 보면 역시 윤석열 대통령의 스타일과 인사 문제다. 이율곡이 강조한 대로 그중에서도 인사가 우선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정권 초기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국민의 눈에 먼저 들어오는 건 ‘내각 구성’이다. 어떤 인물이 발탁되는지를 접하고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여러 수사로 장식된 새 정부의 국정과제 같은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첫 단추인 국무총리 인선부터 참신하지 못했다. 윤 정부에 온통 불리한 정치적 여건들을 고려하면 ‘내각의 얼굴’로서 신선하고 파격적인 발상이 필요했다. 선거 막판에 가까스로 후보 단일화를 통해 승리를 지켜 냈고, 야권에서는 “국회는 우리가 장악하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위협하던 시점이었다. 기댈 것은 국민의 마음뿐이었다.
윤 정부처럼 박빙의 승부로 정권을 잡은 선례로 김대중 정권이 있었다. 이때 대선의 득표율 격차는 1.53%p였으니 윤 대통령의 0.73%p와 별 차이가 없다. 김대중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6일 만에 반대 진영인 TK 출신의 인사를 비서실장으로 선택했다. 국무총리는 자연스럽게 DJP 연합의 상대인 김종필로 정해졌다. 이들에게 얼마나 실권을 부여했는지는 몰라도 정권 초기에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일정 부분 효과를 거뒀다.
반면에 윤 정부에서는 단일화 상대인 안철수와 공동정부를 구성하는 문제가 어느새 흐지부지됐고 오히려 불협화음만 돌출됐다. 국무총리 인선은 인사청문회 통과가 수월한 인사를 고른다는 소극적 자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장관 인사는 어수선한 분위기의 연속이었다. 정권 출범 날짜에 내각 진용을 다 채우지 못했고 후보자 몇몇이 현 정부가 내건 ‘공정과 상식’과 직결된 의혹으로 낙마했다. 교육부 장관과 보건복지부 장관 자리는 계속 삐걱거렸다.
윤 대통령은 이 문제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전 정부의 ‘내로남불’ 이미지가 겹쳐진 것이 뼈아팠다. 이후에도 ‘검찰 출신 중용’과 이준석·안철수·나경원과의 갈등 등이 불거져 나왔다. 혼선의 출발점은 인사 문제였다.
윤 대통령이 ‘2기 내각’ 구성에 나서고 있다. 윤 정부는 지난해 5월 첫 내각 구성 이후에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줄 귀중한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이번 내각 인선과 관련해 윤 대통령의 주목할 만한 발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젊은 장관과 여성 인재를 더 발굴하라”고 지시했다고 하고 그가 자주 입에 올리는 “나는 한번 믿으면 끝까지 사람을 쓴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는 윤 대통령이 이번 인사의 막중한 의미를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율곡의 군주론에는 군주가 반드시 갖춰야 할 여러 지혜들이 나온다. 현 상황에선 소통과 인사와 관련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이번 엑스포 유치 과정에서 어이없는 일은 ‘박빙 판세’와 ‘막판 역전 가능’ 판단이었다. 실제 투표 결과와의 괴리가 너무 컸다. 대통령도 이런 보고를 여러 차례 받았을 것이다. 윤 정부의 내부 소통 문제를 이보다 잘 보여 주는 게 없다. 윤 대통령이 회의 때 혼자 말하는 일이 적지 않다는데 다른 사례는 또 없었을까.
이율곡은 “군주와 나라에 유용한 사람은 반드시 군주가 싫어하는 ‘간하는(옳지 못한 일을 고치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서 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사람을 등용하면 군주의 마음이 위에서 바르게 되고 풍속이 아래에서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소통은 결국 할 말을 하는 인재를 쓰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지금 윤석열정부에게 가장 긴요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윤 정부가 당면한 심각성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위기의식을 가다듬는 일이다. 아울러 일대 쇄신의 각오로 이율곡이 강조한 ‘용현’(用賢·현명한 인물을 기용하는 일)을 실현해 국민의 공감을 이끌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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