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서 열린 ‘아부다비아트페어’(11.23-26)에서 한국화가 직헌(直軒) 허달재(1952-) 작가의 대작들이 매진되었다는 소식이 미술시장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300호에서 500호에 이르는 한국화 대작들 5점이 중동 미술시장에서 다 팔려나갔다는 사실에 그 비결이 궁금했다.
그의 매진 소식이 처음은 아니었다. 첫 참가 해인 2021년부터 3년 연속 내리 출품 대작들이 매진됐다는 소식은 깊이 있게 살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며칠 전 참가 화랑인 ‘이화익갤러리’에서 이대표와 허달재 작가와 함께 자리를 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일단은 함께 참가한 다른 장르의 이정은·차영석 작가 작품들도 매진됐다는 사실의 이면엔 갤러리 측의 오랜 마케팅 노하우와 치밀한 마케팅 전략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갤러리의 마케팅에 관한 부분은 나중에 다른 기회에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일단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사항은 우리 전통에 기반한 한국화가 동아시아 무대를 벗어난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중동 지역이 같은 아시아권이면서도 워낙 지리적·문화적 배경이 달라 수묵에 기반을 둔 한국화가 어필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추진하고 있는 ‘네옴시티’ 같은 경우 건축조형 작업 등에 한해서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정서와 미의식에 충실한 한국화 작품들이 예상치 못한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간혹 어떤 인간관계에 의해 판매되는 경우가 더러 있을 수 있지만, 작은 소품도 아니고 대작의 판매는 어느 무대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3년 내리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 자체에 매료되었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보편적 가치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작품 안으로 깊이 들어가 이야기해야 할 일인 것 같다.
허 작가의 남종화풍은 조부 의제 허백련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경적으로 작가는 어려서부터 붓을 잡았으니 작가에게는 붓이라는 손마디가 하나 더 있는 셈이었다.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것도 당연한 일로 여겼다. 그런데 작가에게 특이한 이력이 있다. 한국화를 전공했으면서도 작가는 80년대 후반 2년여 미국에서 전시와 강의 등의 활동을 한 바 있다. 그는 그때 뉴욕주립 스토니브룩대학교에서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강의하면서 현대라는 보다 넓은 지평에서 한국화에 대한 성찰을 심도있게 하게 된다.
당시 작가가 얻은 중요한 깨달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전통적 세계관, 즉 순환적 이원론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것은 바로 특수성 속에 보편성이 있으며 보편성 속에 특수성이 존재하는 상대주의적 내지는 상호주의적 세계관이다. 마찬가지로 주관과 객관·음과 양 등의 관계도 그러하다. 가장 자기답고 특수성의 극단에 이를 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가 역설적이게도 자연스럽게 구현된다. 지·필·묵에 기반한 한국화 속에 내재한 보편성과 현대성을 찾고자 나선 길에 분명한 확신을 가지며 때를 기다린 배경이다. 한국이라는 국지성에도 세계성이 있으며, 머지않아 우리 고유의 문화가 서구에서도 각광을 받는 날이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이후부터 작가는 한국화 작업을 몇 갈래 양식으로 발표해 왔다. 추상적 양식(‘정중동(靜中動)’, ‘성외성(聲外聲)’ 연작), 수묵 채색에 금니(金泥)가 곁들여진 매화도·수묵 문인화, 다향(茶香)을 주제로 한 반추상적 수묵화(‘문향(聞香)’ 연작) 외에도 다양한 소재의 수묵화들이 포함된다. 시대에 따라 하나의 선을 그리면서 이어진 것은 아니고 복선을 이루면서 교차 반복이 진행돼 오고 있다. 여기서도 과거와 현재가 서로 대체 가능한 시간관을 이루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순차적인 것보다는 순환적인 것이 이치에 맞을지 모른다. 이 가운데 추상적 양식으로 ‘정중동(靜中動)’은 90년대, ‘성외성(聲外聲)’은 2000년 작업으로, 명제에서 보듯 미국 체류 시절 진지하게 다듬기 시작한 상대주의적 인식을 화면에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성외성 연작이 많지는 않으나, 문자 요소와 소리의 상호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작가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해외 무대에서 작품 발표를 한 것은 80년대 후반 미국, 2000년대 중국으로 이어진다. 특히 2008년 베이징 국가미술관·선전 화원에서 초대전이 있었고, 2010년 베이징 798예술구, 2011년에는 베이징 북경화원 제백석 미술관과 상하이미술관에서 정중동 연작 등을 선보인 바 있다. 중국 무대에서 한국화의 심오한 사의성(寫意性)과 기운생동의 필력을 과시하고 아울러 ‘같음 속의 다름’과 ‘다름 속의 같음’의 미학을 공감시키고 역설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최근 중동 시장에서 개가를 올린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찾아온 행운은 아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묵묵히 다져 온 경륜과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매화도 등을 그릴 때 배경이나 특정 부위에 금니를 칠하는 경우가 최근으로 오면서 많아졌다. 채색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먹과 유기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그동안 작가가 역설해 온 이원성을 상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유명(幽冥)·명암·음양·현상과 본질·운동과 정지 등의 요소를 대리하며 아울러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장치인 것이다.
특히 작가의 작품 중엔 ‘다향’과 같은 향기를 주제로 하는 수묵 작업이 많다. 힘차고 호방한 반추상적 필치로 간명하게 그린 다기(茶器)에서 은은하게 감도는 다향 자체에 대한 경험을 ‘문향(聞香)’이라 일컫고 있다. 분방하고 투박한 분청 다기에서 퍼져 나오는 천연의 다향을 맡음으로써 오는 긴장 이완과 영혼의 치유 효과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줄 수 있는 방법도 예의 금니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금니로 찍은 작은 반점들이 마치 흩날리는 꽃잎들 혹은 수증기를 타고 부유하는 그윽한 향기의 입자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문화 전반에 걸친 많은 것들이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제 우리 미술이 주목을 받을 차례이다. 아니 그것이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미술의 라인업을 어떻게 갖출 것인가. 현대미술에서 각광을 받는 뉴미디어·웹툰·애니메이션 등의 새로운 장르들이 앞타석에 설 수 있겠지만 과감하게 한국화가 필두에 서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동안 한국화를 앞에 포진시키는 것에 대해 주저했지만 허달재 작가의 사례에서 보듯 역발상이 필요해 보인다. 아트페어든 비엔날레든 그동안은 서구의 경향을 참조해 왔던 데서 벗어나 우리 보편성을 함유하고 있는 우리 전통 미술을 들고 나올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 이화익 갤러리에서 함께 참가한 이정은 작가의 책가도 대작도 바로 팔려나간 것을 보면 우리 전통 모티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음이 분명하다. 최근의 해외시장에서의 사례들을 폭넓게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전략을 수립해 긴 안목으로 실행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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