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외부에서는 선거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독립주의자 라이칭더의 총통 당선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대만 내부에 폭넓게 형성되어 있는 독립 정서 때문이다.
지난해 8월 대만여론재단(TPOF) 조사에서도 ‘중국과의 통일’을 지지하는 대만인은 11.8%에 불과했던 반면, ‘공식적 독립 지지’는 48.9%, ‘현상 유지’는 26.9%를 차지해 독립 의지의 확고함을 보여 준다. 오히려 라이칭더 당선자가 “대만은 이미 주권국이므로 독립 선포는 따로 필요 없다”며 완급 조절에 나설 정도다.
국방력과 경제력에서 ‘절대 강자’인 중국을 코앞에 두고 거침없이 독립 투혼을 드러내는 것은 외부인들로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실리 추구’로 가는 대안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만과 대만인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만은 서양에서 ‘포르모사’, 즉 ‘아름다운 섬’으로 불린다. 15세기 대항해 시대가 열린 뒤 대만 앞바다를 오가던 서양 선원들이 붙인 이름이다. 섬의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해 마지않던 그들도 이 섬의 진정한 가치에는 무심했다.
조선시대 기록에 오키나와는 일찍부터 등장하지만 비슷한 위치의 대만은 그렇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이성계) 1년(1392년) ‘유구(琉球·오키나와)국의 중산왕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오키나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하지만 대만은 그로부터 290년 뒤인 1682년에 이르러서야 처음 언급된다. 그것도 ‘(대만은) 땅이 메말라서 물산이 넉넉하지 못하고, 사는 백성도 매우 적다고 한다’고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 쪽 기록으로는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에 앞서 대만에 항복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섬 안에 대만을 대표하는 세력이 없어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대만은 동아시아 내부에서도 ‘잊혀진 섬’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방 출신의 원주민들이 대만 내에서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상황은 급변한다. 외부 세력들이 서로 대만을 차지하겠다며 쟁탈전에 뛰어든 것이다. 해상 무역에서 교역로의 ‘로타리(사거리)’에 위치한 대만의 장점이 뒤늦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무력을 앞세워 대만 남부에 진출했고, 스페인은 북부를 점령했다. 이후 패망한 명나라의 부흥 세력이 청나라의 추격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마지막 거점으로 삼은 곳이 대만이었다.
1683년 청나라가 이들을 최종 진압해 대만을 둘러싼 소용돌이는 일단 잦아들었으나 1880년대에는 프랑스가 공격해 왔고 1895년 청·일전쟁으로 느닷없이 일본 영토가 되어야 했다. 그 고비마다 중국 대륙 등 외부로부터 이주민이 대거 유입되어 갈등과 대립이 초래됐다.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중국에 초점을 맞춰 보자. ‘나무 판자 하나라도 바다에 나가면 안 된다’며 바다를 통한 일체의 이동을 금지한 명나라는 ‘절해의 섬’ 대만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명나라의 해금(海禁) 정책을 이어받은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대만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가 아니었다. 명나라 잔존 세력이 대만으로 들어가자 화근을 없애는 차원에서 정복에 나섰을 뿐이다. 청나라는 대만을 평정한 이후 대만 섬을 완전히 비우는 방침까지 논의했고,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협상 카드’로 일본에 넘겼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의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과거 대만의 ‘주인’이던 원주민들이 평온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서양인들이 총과 대포를 앞세워 침략해 왔다. 이들은 또 노동력으로 쓰겠다며 중국 대륙의 한족을 데리고 왔다.
거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공존을 모색했으나 또 다른 이주민이 새로 유입되면서 모든 게 도돌이표가 됐다. 청나라 통치 시기에만 해도 크고 작은 민란이 154차례나 일어났을 정도로 이들의 삶은 고통스럽고 피폐했다. 다양한 출신들이 뒤섞여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도 살아온 결과물이 오늘날의 대만인이다.
어느 나라나 타고난 ‘팔자’를 갖고 있는 법이라지만 대만에겐 그 팔자가 유독 가혹하고 사나웠다. 대만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중국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오랜 슬픔이 쌓이고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대만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다. 그래서 ‘운명’과 맞서 싸우려는 이들의 독립 의지에는 남다른 자존과 인간의 생존 본능이 담겨 있다.
대만인의 눈물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한국이다. 한국도 오로지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시로 시련의 한복판에 내몰려야 했다.
대만이 ‘포르모사’인 것처럼 한국은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로 불린다. 기묘한 연계감을 느끼면서 우리도 대만인처럼 절실한 시대정신을 갖고 움직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대만은 우리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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