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광복절에 드루킹 사건 주범 김경수 씨가 복권됐다. 작년 사면에 이어 복권까지 된 김경수 씨는 정치 복귀에 아무런 제약이 없게 되었다.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지만 선거 관련 부정을 저지른 김경수 씨를 복권까지 시킨 것은 지나치다는 반응이 여권에서도 많았다.
그러나 이명박정부 시절 국정원을 동원해 민간인 댓글 부대를 운영한 혐의로 복역하다 가석방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댓글 여론 공작 관여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조현오 전 경찰청장도 사면·복권되었다. 최소한 여야 간 형평은 맞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인사가 사면·복권 대상에서 누락되었다. 바로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다. 1945년생으로 여든 살을 앞둔 그는 1970년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 신분으로 전태일의 장례식을 주도한 이래 평생을 진보 운동에 바쳤다. 서울대 법대 학생장 추진(1970년)·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1971년)·민청학련 사건(1974년)·청계피복노조 사건(1977년)·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년)·5.3 인천 사태(1986년)·중부지역당 사건(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섯 번 수감돼 9년 이상의 징역을 살았고 수배자로 보낸 시간은 더 길다.
이런 그가 민주화유공자 신청만 했다면 보상금이 10억도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2019년 5월11일 일요신문 인터뷰(‘장기표, 5·18민주화운동 보상? 줘도 안 받아’)에서 그는 “그 돈은 국민이 낸 돈이고 독립운동이든 민주화운동이든 의로운 일은 명예로 선양해야지 자꾸 돈으로 보상하면 퇴색된다. 장사하는 사람이나 노동자는 데모하기 어려웠던 것에 비하면 대학생으로서 데모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특권이다.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다. 민주화 업적은 모두의 것이지 운동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농사 짓고 공장에서 일한 사람도 있었기에 나라가 안 망한 것이다. 다양한 부문에서 다양한 노력이 총화를 이뤄서 사회가 발전한 것인데 어느 한 부분의 노력만 추켜세우면 안 된다”고 밝혔다. 운동권을 특권층화하려는 입법 시도에 대한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그는 평생 ‘옳은 것’을 추구했지만 현실에서는 ‘무관의 제왕’이었다. 정치적 고향인 운동권 진영의 이익에 충실했다면 이미 장관에 국회의원을 거뜬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력 정당에 몸담지 않았고 어떠한 임명직도 맡지 않았다. 오히려 신문명정책연구원을 설립해 90년대부터 이념과 진영을 초월해 꾸준히 미래 어젠다를 설파했다. 운동권 출신 중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의 도그마를 받아들이지 않은 인물은 장기표 원장이 아마 유일할 것이다.
그런 그가 2020년 총선에서는 파격적으로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에 입당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2021년 가을에는 국민의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도 뛰어들었다. 시대착오적인 문재인 정권과 이재명 집권을 막기 위한 결단이었던 것 같다.
이 무렵 그는 매우 중요한 사안을 공론화하는 데 발벗고 나섰다. 바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의 성남 대장동 비리 의혹이다. 그는 먼저 이재명 후보 아들이 천화동인에 근무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으로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만한 근거는 충분히 있었지만 이재명 후보 측 해명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면 끝내면 될 일인데도 이재명 캠프는 늘 하던 방식대로 장기표를 고발했다. 그러나 장기표의 기자회견에 대한 이재명 본인과 캠프의 공식 대응으로 마침내 이재명 비리 보도의 물꼬가 터지게 됐다. 그 전까지는 이재명의 집요한 고소·고발이 두려워 메이저 언론도 그의 비리에 관한 보도를 주저했을 정도였다.
장기표는 고발에 굴하지 않고 ‘대장동 특검 촉구 및 대장동게이트 진상규명 범시민 연대’를 결성해 2022년 1·2월 서울·부산·창원 등지에서 이재명의 비리와 형수를 상대로 한 패륜 발언을 알리는 집회를 개최했다. 0.7%의 아슬아슬한 표차로 이재명 당선을 저지할 수 있었던 데는 장기표와 범시민연대의 이재명 비리 공론화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정부에서 어떠한 공직도 맡지 않았다. 오히려 공직선거법 위반죄로 기소돼 재판받는 신세가 되었다. 필자가 변호를 맡았기 때문에 사건을 잘 아는데, 이재명 아들의 천화동인 재직 건은 의심해 볼 만한 충분한 단서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동 비리가 사실이라면 이는 중대 범죄라서 대통령 후보 결격 사유다. 중대 범죄자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데 등록된 선거운동원이 아니라는 점과 선거운동 기간의 제약으로 의혹 제기를 못 한다면 이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다. 그래서 헌법소원도 제기했다.
장기표 사건 수사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도 밝혀졌다. 박영수 전 특검이 2015년 7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17개월 간 화천대유의 제1호 직원으로 재직한 사실이 수사기록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박영수와 이재명은 경제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장동 50억 클럽 멤버들이 하나같이 법조 고위직 출신인 이유를 짐작케 한다. 장기표 원장은 기자회견으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검찰은 침묵하고 있다. 그는 국회의원 특권 폐지를 공약으로 하는 특권폐지당을 창당해 지난 총선에도 참여했다. 원내 진입은 실패했지만 특권 폐지의 당위성을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실정법의 한계를 넘을 수 없어 700만 원과 400만 원 두 건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지난 달 말기암 진단을 받은 사실을 세상에 알렸고 현재 투병 중이다.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광란의 팬덤정치가 횡행하는 정치 현실을 걱정하고 ‘위기의 한국 추락이냐 도약이냐’는 책도 출간했다.
장기표는 특별한 수입이나 재산도 없지만 1100만 원의 벌금을 모두 납부했다. 그러나 공직선거법 유죄 판결로 피선거권이 박탈된 상태다. 물론 그가 다시 선거에 출마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말 사면 때에는 거액의 민주화운동 보상금도 마다할 정도로 명예를 중시한 그를 꼭 복권시킬 것을 법무부와 대통령실에 건의하고 싶다. 그의 평생 공로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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