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47] 춘궁기에 피어나 허기 달래주었던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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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가뭄은 ‘찔레꽃 가뭄’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2-03 09:12:17

▲ 모내기가 한창일 때 피어나는 찔레꽃 순은 달콤한 맛이 난다. 윤상구 사진작가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어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었던 동화작가 정채봉은 하늘나라 엄마가 휴가 나와 5분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라고 자신의 시에 썼다. 엄마가 없으면 위로해주고 편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서럽고 슬프다. 거기다 배까지 고프면 그 처량함과 절망스러움을 어디다 비유할까.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라는 노래는 가수 이연실이 불러 유명해졌다. 배가 고파도 변변하게 먹을 것 없는 아이 곁에는 위로해줄 엄마도 없다. 가사의 그런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언제라도 눈물이 나고 구슬퍼진다.

배고픈 아이들 간식이었던 달콤한 맛 찔레순

이태선 작사·박태준 작곡의 이 노래 제목은 ‘가을밤’이다. 하얀 찔레꽃은 봄에 피어나는데 제목이 가을밤이라니 조금 의아하다. 그런데 이 노래의 2절부터 4절까지 가사를 살펴보면 엄마가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는 모습은 꿈일 뿐이다. 화자가 가을밤에 홀로 앉아 다시 만날 수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옛일을 회상하는 내용인 것이다.

찔레꽃은 모내기가 한창인 계절에 피어난다. 예전에 이 시기는, 쌀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기 전으로, 식량이 부족한 ‘보릿고개’였다. 이 무렵에는 가뭄도 자주 들었는데 이때의 가뭄을 ‘찔레꽃 가뭄’이라고 한다. 그런데 야산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찔레꽃 이파리를 따서 먹으면 부족하나마 허기를 달랠 수 있었고 달콤한 맛이 나는 연한 찔레 순은 아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찔레꽃에 관련된 전설도 노래 못지않게 서글프다. 고려 말 원 간섭기에 ‘찔레’라는 소녀가 병든 아버지와 함께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 찔레는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갔는데 우여곡절 끝에 그리운 고향으로 겨우 돌아온다. 하지만 흩어진 가족들을 찾을 수 없었던 찔레는 상심하여 죽고 말았다. 그녀가 눈물 흘린 자리에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을 찔레꽃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족 잃은 ‘찔레’의 눈물에서 피어난 꽃

▲ 식량이 부족했던 ‘보릿고개’에 허기를 달래주었던 찔레꽃. 윤상구 사진작가

원나라에 공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1275년부터이다.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 처녀들이 징발 대상이었는데 부모들은 딸이 공녀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열 살만 되면 혼인시키려 했다. 고려 시대 조혼 풍습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물론 관청에서는 공녀로 보낼 처녀를 확보하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원나라로 간 공녀는 대부분 황실의 궁녀가 되거나 고관들의 시녀가 되었지만 노비로 팔리는 사람도 있었다.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강제로 낯선 땅에 가서 중노동을 하며 일생을 보내야 했던 공녀들의 삶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징발된 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1336년 고려 사람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그 처절함을 잘 드러나 있다.

“한 번 사신이 오면 나라 안이 소란하여 닭이나 개까지도 편안할 수 없습니다. (…) 선발 안에 들게 되면 그 부모나 일가친척은 서로 모여 통곡하여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으며 국경에서 송별하는 데 이르러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근심 걱정에 기절하는 자도 있으며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습니다.”

공녀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기씨

공녀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도 있다. 궁녀였던 기씨는 원나라 순제의 총애를 받아 귀빈이 되었고 나중에 북원의 황제가 된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순제가 기씨를 총애하자 제1황후 타나시리는 기씨를 모질게 핍박했다.

하지만 기씨는 참고 견디며 때를 기다렸다. 타나시리 황후가 역모에 연루되어 쫓겨난 후 순제는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지만 몽골에는 황후 가문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제1황후는 될 수 없었지만 기씨는 황자의 생모이기에 제2황후가 될 수 있었다. 순제는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비롯한 형제들을 모두 고위 관직에 임명하였다.

기황후를 등에 업은 기씨 일족은 고려 최고의 권문세족으로 행세하면서 온갖 폐해를 저질렀다. 기철은 고려를 원나라에 복속시키려는 이른바 ‘입성 책동’을 주도했고 고려 왕인 충혜왕을 내쫓는 일에도 앞장섰다.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빼앗는 것은 물론 고려 왕까지도 손안에서 넣고 주무르려 했다.

그들의 전횡을 못마땅히 여겼던 공민왕은 원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1356년, 기철 일족을 제거했다. 기황후는 복수를 위해 공민왕을 폐위하고 군사 1만 명을 보내 고려를 침공했다. 자신의 조국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망국 위기로까지 내몬 기황후는 찔레꽃 전설에 등장하는 가련한 공녀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기황후라고 삶이 행복했을까. 공녀로 끌려간 이후 온갖 핍박과 음모·암투와 권력 투쟁 속에서 맘졸이며 살았을 기황후. 하얀 찔레꽃은 그녀가 흘린 눈물에서도 피어났을 듯하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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