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35] 킬리만자로의 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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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03 06:30:09

그렇지만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머리가 아픈 적은 없었다. 엄마를 닮아 술이 약한 오빠나 언니와 달리 승연은 주당인 아버지를 닮았다. 태주가 비워진 승연의 잔에 술을 채웠다. “저에 대해서 애들이 뭐라고 안 해요? 저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승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아차, 싶었다. 돌려서 말한다는 게 그만 직진해 버린 것이다. 김태주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후 고개를 돌려 허공에 내뿜었다. 들이켠 양보다 많은 연기가 태주 목구멍을 빠져나왔다.

“별로 궁금한 거 없어. 학교에 불만 많은 영문과 1학년, 비싼 청바지가 잘 어울리고, 누구 앞에서든 자기가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 나라와 민족의 미래 따위엔 관심이 없고, 사회 불평등·불합리한 구조적 모순 같은 이슈엔 더욱 관심 없는, 부유한 집에서 자란 고집 센 막내, 그 정도면 많이 아는 거 아닌가. 내가 뭘 또 알아야 하지?”

‘민정’을 나올 무렵 해가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9월 말 오산 들녘에 부는 바람은 따뜻했다. 버스 정류장은 한가했다. 태주는 버스 시간이 남았으니 아름식당 뒤쪽 언덕으로 걷다가 오자고 했다. 그쪽에서 본 서쪽 하늘 노을이 아름답다며. 아름식당 뒤쪽을 지나 비포장도로로 걸어가는데 태주가 배낭을 뒤지더니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냈다. 승연에게 걸음을 멈추라면서 자신의 이어폰을 건넸다.

“여기서는 이 음악을 듣고 가면 좋아, 노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야, 아는 노래일 거고.”

잠시 후 노래가 흘러나왔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태주는 전주곡이 나오는 시점에 맞춰 볼륨을 높였다. 태주는 노래를 따라 하고 있었다. 가사가 나오는 타이밍과 정확히 맞았다. 이 길을 걸으며 들녘의 석양을 바라보며, 수없이 반복하며 들었을 그가 상상되었다. 노래가 좋다는 건, 멜로디든 가사든 감정이입이 됐다는 것이다. 승연은 들으면서 그에게 아픈 사랑의 고통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밀려오는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며 거센 폭풍우에도 휩쓸리지 않는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김태주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의 어깨에 담배 연기보다 무거운 공허가 내려앉았다. 하루를 불사르고 지평선 너머 뜨거운 여운으로 사라지는 석양이 그의 삶과 닮았을지 모른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벌겋게 익은 서쪽 하늘 속으로 사라지자 태주는 승연에게 다가와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뺐다. 승연은 태주에게 담배를 한 개비 달라고 했다. 태주는 피식 웃더니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멋있어 보이려고 피우지는 마. 담배를 승연의 입에 물리고는 성냥불을 붙였다.

“멋있어 보이려고요.” 승연은 애써 태주의 눈빛을 피했다. 담배 연기가 목구멍을 지나는데 따갑지 않았다. 헛기침도 안 나왔다. 승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건, 이 모든 건, 내 계획에 없던 건데. 태주의 뒤를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승연이 태주에게 다시 물었다.

“근데 윤희숙 선배 왜 안 보이죠? 휴학했어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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