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53] 고흐와 헤세에게 사랑받은 붓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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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묻힌 붓과 같이 생긴 꽃봉오리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3-24 14:42:44

▲ 얇고 길게 뻗은 잎은 난초와 흡사하여 두 식물이 자주 혼동되기도 한다. 윤상구 사진작가

붓꽃 모양을 보면 옛사람들이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곧바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꽃봉오리가 먹을 묻힌 붓과 같이 생겼는데 실루엣을 보면 다 쓴 붓을 붓통에 꽂아놓은 듯한 형상이다. 꽃은 5〜6월에 주로 피는데 하루 만에 바로 시들어버리는, 은근히 까칠한 식물이다. 잎만 보면 얇고 길게 뻗은 모습이 난초와 흡사하여 두 식물이 자주 혼동되기도 한다.

화투에서 5월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흔히 ‘난초’라 불리는 화초도 붓꽃의 한 종류인 제비붓꽃이다. 화투의 붓꽃 그림은 일본 아이치현 치류시에 있는 ‘야츠하시’라는 마을과 관련이 있다. 야츠하시(八つ橋)는 연못 같은 물가에 판자를 이어 놓은 다리로 일본 정원에서 꽃을 가까이 감상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이다.

아이리스는 붓꽃의 영어 이름

야츠하시 마을은 일본 고대 소설 ‘이세 이야기(伊勢物語’에 ‘다리가 많이 놓여 있고 그 사이에 붓꽃이 핀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5월을 나타내는 화투패 넉 장 중 한 장에는 노란색 다리가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이는 실제 야츠하시 마을에 있는 사찰 무료주지(無量寿寺)의 정원풍경을 그린 것이라 한다.

영어 이름이 아이리스인 붓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의 사랑을 받아왔다. 기원전 1500년 즈음 이집트 파라오였던 투트모세 3세는 붓꽃을 승리의 표시로 여기고 가까이 길렀다고 한다. 그는 카르나크 아몬 신전 벽과 파라오의 왕홀 등에 붓꽃을 새겨넣어 ‘지지 않는 꽃’으로 만들었다.

필사적으로 붓꽃 그림을 그린 고흐

▲ 붓꽃은 꽃봉오리가 먹을 묻힌 붓과 같이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게티이미지

붓꽃을 ‘불멸의 꽃’으로 만든 또 한 명의 거장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는 1889년 5월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부터 이듬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많은 붓꽃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열심히 그리면 자신이 미쳐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흐는 그림을 ‘내 병의 피뢰침’이라고 불렀는데 마침 지천에 널린 붓꽃이 만만한 대상물이었다. 붓꽃 그림들은 고흐가 온전한 정신을 붙들어 매려는 필사적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 ‘아이리스’는 그 여러 붓꽃 그림 중 하나로, 고흐가 사망하기 전 해 프랑스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정신병원에서 그린 그림이다. 그의 동생 테오는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과 함께 이 그림을 그해 9월 파리 독립예술가협회 연례 전시회에 출품했다. 테오는 전시회에 대해 형에게 보낸 편지에 “‘붓꽃’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띄어요. ‘붓꽃’은 공기와 생명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그림입니다”라고 썼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는 ‘붓꽃의 향기와 꽃잎이 다양한 푸른 빛을 띠며 나부끼는 모습은 창조의 비밀을 알려주는 열쇠, 붓꽃 꽃받침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16년에 쓴 동화 ‘붓꽃’은 붓꽃을 사랑한 안젤름이라는 남자 이야기이다.

‘붓꽃의 향기와 꽃잎이 나부끼는 모습은 창조의 비밀을 알려주는 열쇠’

▲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는 붓꽃이 나부끼는 모습은 창조의 비밀을 알려주는 열쇠라고 했다. 윤상구 사진작가

헤세는 안젤름의 시선을 통해 “해마다 안젤름이 매혹과 은혜를 느끼는 최대의 순간은 최초의 붓꽃이 피는 때였다. … 붓꽃은 순진한 소년 시절부터 그의 동반자로서 여름마다 새로워지고 더욱 신비롭고 감동적으로 되었다. 그는 자주 꿈을 꾼다. 지상의 현상은 모두 하나의 비유다. 모든 비유는 영혼이 준비만 되어 있으면 거기를 지나 세계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열린 문이다. 그 내부에 가면 너도나도 낮도 밤도 모두 한 몸인 것이다. 그 문과 길을 통해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것이었다”라고 표현하였다. 드러난 현상에 깊이를 더한, 헤세 특유의 필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헤르만 헤세는 조국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시대에 살아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헤르만 헤세는 독일 국민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글을 스위스 〈신취리히 신문〉에 발표했다. 그러나 곧이어 헤세는 독일인들에게 매국노,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스위스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전쟁 기간 겪은 여러 고난이 그의 작품에 많은 흔적을 남겼는데 그 무렵 탄생한 작품이 성장 소설 ‘데미안’이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이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집단 우울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치 치하 독일에서 헤세는 유대인의 작품을 대중에게 알리고 나치즘을 비판하다가 나치에 탄압당했다. 1930년 말부터는 독일 내에서 헤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출판이 금지되었는데 당시 나치는 헤세의 작품 인쇄를 막기 위해 종이를 공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헤세는 다시 한번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헤세는 스위스인으로 살다가 1962년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정원 가꾸기에 몰두했다는 헤세 곁에는 붓꽃이 늘 함께했을 것 같다.

고흐에게 붓꽃이 현실을 붙들어 매려는 안간힘이었던 반면 헤세에게 붓꽃은 실망스러운 현실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문’이었던 듯하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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