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75] 로얄장 2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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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01 06:30:38

“그래서 책방에 가서 샀어. 금화가 읽어 보고 여기 언니·동생들한테도 빌려줘. 서민의 삶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더라. 여기 이런 말이 나와.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근데 틀렸어. 천국에 살면서 지옥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옥을 경험하거든.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꿈이라도 꾸지. 안 그래?”

권지호의 말을 들으면서 책을 후루룩 훑어보는데 책 사이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딱지 모양으로 접은 쪽지였다. 희숙은 누가 볼까 놀라 얼른 집어 들었다. 화장실에 가서 쪽지를 펼쳤다. 로얄장 207호, 9시. 야근 없음.

로얄장은 공장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로와는 반대편 골목에 있어서 사람이 뜸했고 희숙 역시 그쪽으로 걸어 보긴 처음이었다. 희숙의 옆을 승용차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차를 타고 왔다가 차를 타고 돌아 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카운터에 앉은 중년의 여자는 희숙을 힐끔 보았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곳이었다.

희숙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207호로 들어갔다. 비교적 깨끗하게 보이는 요와 이불이 창가 밑에 놓였고 방바닥 중앙에 맥주와 마른안주·귤 한 봉지가 사각 쟁반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희숙이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가자 권지호가 반색했다.

“어서 와, 일하느라 고생했네. 내가 오늘 금화 부서만 야근시키지 말라 했어. 포장 작업은 다음 주부터 해도 돼. 여기가 따뜻하니 이리로 앉아서 몸 좀 녹여.”

권지호는 일어나서 희숙의 점퍼를 벗겨 벽에 박힌 옷걸이에 걸었다. 그래도 쭈뼛하고 서 있자 희숙의 어깨를 감싸안아 바닥에 깔린 요 위로 앉혔다. 추우면 요 아래로 손을 넣어 봐. 요 아래가 뜨끈뜨끈해. 권지호가 희숙의 손을 잡아당겨 요 밑으로 넣으며 말했다. 이미 샤워를 했는지 그의 몸에서 비누 향이 났다. 권지호가 요 아래로 넣은 희숙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놓아 한참 동안 손이 데워지도록 놔뒀다. 희숙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한 손을 빼내 희숙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어색함도 잠시야, 곧 가까워질 텐데 뭘.” 권지호는 능숙한 동작으로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병맥주 뚜껑을 땄다. 하얀 기체가 몽글몽글 솟구쳤다. “한 잔만 마시고 시작하자.”

시작? 섹스하자는 말이었다. 긴장으로 목이 마른 희숙은 요 밑에 두었던 손을 빼 권지호가 따 놓은 맥주병을 입에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어허, 성격 급하네. 그렇게 마실 거면 맥주병 입구 좀 닦아 주려고 했더니. 권지호는 말하면서 동시에 귤껍질을 까고 있었다. 희숙이 반병쯤 마시고 병을 내려놓자 희숙의 입에 땅콩과 귤을 넣어 줬다. 비즈니스부터 하시지요. 희숙이 상의를 훌러덩 벗자 권지호가 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