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세대 공작원 위한 자본주의 체험학습
이런 가운데 1988년 12월 초에는 약 보름간에 걸쳐 김명걸과 함께 해외 실습을 다녀왔다.
해외 실습은 1980년대 이후 북한 출신의 새 세대 청년들이 공작원의 대부분을 구성하게 되면서 새롭게 실시된 프로그램이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살아온 공작원들은 앞으로 공작 활동을 해야 할 외부 세계,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들 새 세대 공작원들에게 겉핥기 수준으로나마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고 그것을 공작 활동에 활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바로 해외 실습이었다.
해외 실습 위해 마카오로
당시 공작원들의 해외 실습 장소로는 중국의 북경과 광주 그리고 마카오와 홍콩·태국·말레이시아 등이 이용되었는데 우리도 그러한 실습지 가운데 한 곳인 마카오로 해외 실습을 갔다. 우리 일행은 나와 김명걸, 담당과의 이 지도원 등 세 명이었다.
우리는 평양 순안공항에서 중국 항공기 편으로 북경까지 가서 중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나온 당시 해외공작 담당과 지도원의 안내를 받아 대사관 내에 있는 초대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다시 중국민항 편으로 광주까지 갔다.
광주에 도착해서는 그곳 무역대표부 직원으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는 해외공작과 지도원의 안내를 받아 시내에 있는 ‘백운호텔’에 하루 동안 머물면서 간단히 시내 관광과 쇼핑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그곳에 파견 나와 있던 지도원이 운전하는 벤츠 승용차 편으로 마카오로 향했다. 거리가 얼마나 먼지 아침 일찍 광주에서 출발했는데, 저녁 늦게 마카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카오 현장 실습… ‘어디서든 살 수 있겠다’
우리 일행은 마카오에 도착해 5일가량 머물며 호텔과 여관·여인숙 등 여러 숙박시설을 이용하며 각각 다른 환경에서 생활 체험을 했다. 또한 관광과 쇼핑을 하면서 여러 가지 서비스 시설을 직접 이용해 보는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 방식과 사회 실상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하기 위한 실습을 진행했다.
시장이나 슈퍼마켓·전문 상가·음식점·다방·교회·은행·카지노·개 경주장·택시·해수욕장·극장 등을 보거나 실제로 이용해 보기도 하고 물건도 사 보면서 약간이나마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 방식에 대한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때 난생 처음 에로 영화와 리스보아 호텔 카지노 내에서 하는 스트립쇼도 보았는데 충격이었다.
나는 마카오에서의 해외 실습을 통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경험을 얻게 되었다. 말하자면 언어와 피부색ㆍ풍습 등 모든 것이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남한에서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마카오에 가면서 1인당 1500달러 정도의 돈을 가지고 갔는데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당시에 인기 있던 일제 자동카메라와 시계, 카세트 라디오와 양복 원단 등 필요한 것들을 어느 정도 사 올 수 있었다. 그 후 그 물건들은 고향에 가져다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 나중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마카오에서 광주, 북경 거쳐 귀국
마카오에서의 해외 실습을 마친 우리 일행은 다시 해외 담당과 지도원의 승용차를 타고 중국 광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다시 2일가량 체류하면서 백운산 공원과 야시장 등을 관광하고 중국민항 편으로 북경까지 가서 그곳에서도 3일가량 체류했다.
이때 북경에 체류하면서 해외공작과 지도원의 안내로 북경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고 자금성과 만리장성·이화원·명나라 왕릉(13릉) 등 중국의 고대 역사 유적을 관광했다. 그리고 다시 북경에서 북한 항공사인 조선 민항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것으로 해외 실습을 마무리했다.
착잡하고 초조했던 8년간의 공작원 생활
1981년에 공작원으로 선발된 후 1988년까지 8년간 공작원 생활을 하면서 내 심정은 한편으로는 착잡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조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공작 임무를 받고 남한에 침투했다 복귀해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하고, 한편에서는 적지 않은 공작원들이 몇 년 동안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아무 일도 해 보지 못한 채 제대(전역)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제대한 공작원들은 자의에 의한 제대가 아니라 인원 감축 조치에 의한 제대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제대한 공작원들이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또 대다수가 나와 함께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전투원양성반을 졸업한 친구들이어서 충격이 컸다. 그래서 1년 뒤인 1989년 가을까지 최선을 다했는데도 희망적이고 결정적인 변화가 없으면 그들처럼 타의에 의해 제대하는 수모를 겪기 전에 스스로 공작원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10년이 거의 다 되어 매일 반복되는 단조롭고 지루하고 고독한 생활에 어느 정도 지쳐 있었다. 특히 더 나이 들기 전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복잡한 마음으로 맞이한 1989년 새해
나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1989년 새해를 맞이했다. 예전과 같이 신정 연휴 첫날 초대소에서 김명걸과 함께 김일성·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를 한 다음 임 과장·최 지도원과 동석 식사를 했다. 동석 식사란 중요한 명절 때마다 술을 곁들여 하는 일종의 명절 파티인데, 초대소에서는 이것을 흔히 ‘동석 식사’라고 한다.
동석 식사가 끝난 후 김명걸은 이미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장·지도원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집으로 갔다. 초대소 요리사도 그동안 학원에 가서 공부하던 자식들이 방학 기간이어서 평양 시내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러 가고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새해 첫날부터 아무도 없는 빈 초대소를 혼자서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신정 다음 날인 1월2일 오전에 내가 있는 초대소로 대남 담당 이원국 부부장 전용 벤츠 승용차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초대소 앞마당에 나가 차에서 내리는 부부장과 새해 인사를 나눈 다음 그를 안내해 초대소 내부로 들어갔다.
혼자 지키고 있는 초대소를 방문한 부부장
초대소에 들어선 이원국 부부장은 조장과 초대소 요리사가 모두 시내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게 요즘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물어본 다음 문득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이 선생, 일을 한번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소?”
초대소에서는 누구든 공작원을 부를 때 그 대상의 나이에 상관없이 ‘선생’이라는 호칭을 쓰는데, 그 앞에 성씨나 직책을 붙여서 부른다. 예를 들어 ‘조장 선생’이라든가 ‘김 선생’ 또는 ‘이 선생’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요리사나 기타 종사자들이 공작원들을 부를 때는 ‘조장 선생님’이라든가 ‘김 선생님’ 등의 호칭으로 부른다.
나는 부부장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켜만 주십시오. 어떤 임무든지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담당 부부장은 자신에 찬 대답을 듣고 자신도 기분이 좋았던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좋소. 나도 선생이 그렇게 대답하리라 믿었소. 그럼, 우리 함께 손잡고 한번 일을 잘해 봅시다. 그런데 앞으로 선생이 일을 하려면 지금의 조장 선생과는 같이할 수 없소.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안 해도 선생이 대충은 짐작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래서 다른 공작조의 조장과 함께 새로운 공작조를 편성해 선생에게 일을 시키려고 하는데 선생 생각은 어떻소?
그 공작원은 선생보다 나이도 많고 사회 활동 경험도 많은 사람이오. 언젠가 선생도 나이 많은 사람과 같이 일을 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제기한 적이 있었지? 그래서 부서에서도 여러 가지로 논의한 끝에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선생 의견은 어떤지 듣고 싶소.”
부부장이 가져온 반가운 소식
나는 이미 지도원을 통해 당시 조장이었던 김명걸이 잠꼬대가 심해 그와 같이 남한에 침투하는 것은 호박 쓰고 돼지 우리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무모한 일이며, 절대로 같이 남한에 침투할 수 없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부부장의 말은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제가 이미 그런 의향을 당조직에 전했고, 또 저는 부부장 동지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니 어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좋소. 우리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오늘 나와 선생이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겠소. 특히, 내일 조장이 집에 갔다 들어올 텐데 그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마시오. 조장도 사람인데 조원부터 일을 시킨다는 것을 알면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소?
그러니까 내가 들어와서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이것은 선생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비밀을 지킨다는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오. 알겠소?”
나는 너무도 기쁘고 반가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실전에 투입된다는 소식은 드디어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기 성취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금성정치군사대학(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4년, 이어서 노동 단련과 간부현실 체험, 철저한 밀봉 교육과 적구화 교육 등 9년여에 걸쳐 견뎌 낸 엄혹한 훈련들이 마침내 끝나는구나 하는 해방감 같은 것도 몰려왔다.
이원국 부부장은 또다시 앞으로 일을 잘해 보자고 한 다음 초대소를 떠났다. 나는 부부장이 돌아간 후 옷가지와 책을 정리하는 등 다른 초대소로 이사할 준비를 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이렇게 3대에 걸쳐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주민들이 그런 통치 방식에 어떻게 순응하며 따를 수 있는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나로서는 무슨 다른 특별한 그들만의 비결이라도 있는 건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1인 군부독재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 전 세계의 역사를 통해 이미 증명됐는데, 북한에선 어떻게 3대에 이어 세습 독재 체제가 잘 작동되고 있는 걸까요?
아버지 : 북한이 김씨 3대 세습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몇 가지 비결이 있어.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강력하면서도 거미줄처럼 촘촘한 주민 통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어.
북한의 경제 형편이 최악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주민 통제 시스템이 얼마나 촘촘하고 강력한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김정은이 측근들에게 “인적 드문 심심산골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내(김정은)가 들을 수 있게 하라”고 강조했을 정도로 주민 감시 통제 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실제로 노동당 간부를 하면서 주민 감시 통제 시스템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느꼈어. 왜냐하면 위와 같은 주민 감시 통제 시스템을 유지하는 조직이 바로 노동당이라는 거대한 집단이거든….
북한이 3대 세습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체제에 반대하거나 체제 유지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본인은 물론 자식과 부모까지 3대를 사형·구속·정치범수용소 수용 등으로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도 한몫하고 있어.
더구나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고 주민을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하고 있는데,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외부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는 것 역시 3대 세습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어.
결국 김씨 3대 세습 체제를 붕괴시키고 북한 주민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외부 정보를 들여보내 그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해서 그들 스스로 김정은 체제에 반대해 투쟁하도록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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