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 사회 성역의 하나를 건드릴 생각이다. 현대사 속의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빛과 그늘을 살펴보는 자리다. 이는 ‘현대 가톨릭, 과연 건강한가’를 물었던 지난 칼럼에서 이미 예고한 바 있다.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며, 국민적 존경 속에 애칭 ‘혜화동 할아버지’로 불린다. 그를 최고의 영광인 복자-성인으로 추대하고자 한국 가톨릭 내에서 시복 시성도 추진 중이다.
지금은 정말 복자 성인에 걸맞는 지를 살피기 위해 그의 생애와 업적 등을 연구하는 초기 단계다. 그렇다면 다양한 시각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다소 비판적인 이런 칼럼도 필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김수환을 건드리면 큰일 나는 걸로 아는 세상 통념부터 바꿔 줄 필요가 있다. 은근히 논란 속의 인물인 김수환은 누구일까. 그는 한마디로 ‘미스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다. 평생을 바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구현하려 한 삶이었다.
1962∼65년에 열렸던 바티칸공의회가 내세운 ‘열린 교회’ 정신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알았다는 뜻이다. 반면 그 부작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우선 다른 종교에도 진리의 빛이 있다는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세상이 종교 다원주의로 흘러가는 걸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게 지난 반세기 넘게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범람과 함께 세상을 어지럽히고 끝내 황폐화시키고 있는 측면을 그는 외면했다는 얘기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살아생전 유학자 김창숙의 묘소 앞에서 여섯 차례 절하길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정신 나간 인간 도올 김용옥이 진행하는 TV 논어 강의에 덜컥 출연해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으며, 그저 참되게 살면 된다”는 무책임한 발언도 예사로 했다. 경주의 석굴암을 돌아본 뒤 “한국인의 몸에는 불교의 피가 흐른다”는 발언을 해서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그는 비교 종교학자가 아닌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당시 국민은 “그런 게 바로 포용적 태도”라며 넘어갔지만 우린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김수환 자신도 그런 어울렁더울렁 종교가 되돌이킬 수 없는 교회 타락의 시작임을 몰랐다. 결정적으로 김수환 추기경은 하나님은 교회 못지 않게 세상을 통해 직접 일하신다는 쪽으로 바뀐 공의회 정신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 결과 사회 정의와 인권 문제가 실천되는 현실에 지나치게 몰두했다.
1960년대 이후 가농, 즉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강화도 심도직물 사태 같은 노동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올바른 사목 활동이라고 믿고 그걸 실천한 것이다. 그러다가 끝내 박정희정부와 충돌했고, 또 그의 엄호 아래 정의구현사제단(정구사)이 악다구니처럼 날뛰었다. 그가 정구사에 반대했다는 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 김수환 추기경이야말로 정구사의 사실상 배후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물어봐야 한다. 명분 그럴싸한 인권·노동 문제에 올인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바라본 현대사가 맞는가, 대한민국 산업화·현대화를 위해 매진했던 큰 시야의 박정희가 옳았던 것인가. 당신이 판단해 보시라. 어쨌거나 세상 참 매정하다. 손에 흙 한번 묻혀 본 일 없이 입바른 소리만 했던 김수환은 ‘우리 곁에 온 성자’이고, 역사의 위대한 개척자인 박정희는 독재자란 말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자. 김수환 자체가 바티칸의 비밀 무기였다. 1960년대 바티칸은 김수환을 제2차 바티칸공의희 정신을 구현할 전략적 카드로 삼았던 것이다. 평전 ‘아, 김수환 추기경’의 저자 이충렬이 그렇게 말한다. 즉 바티칸은 아시아의 40대 젊은 주교 김수환이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할 새로운 인물이라고 보고 그를 한국인 첫 추기경으로 깜짝 발탁했다.
당시 한국인에게 가톨릭을 상징하던 인물은 김수환이 아니고 연세 많은 노기남(1902~84) 대주교였는데, 그걸 무시한 것이다. 어쩌면 바티칸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본 셈일까. 김수환은 젊은 시절 ‘가슴에 불덩어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알아챈 분이 일제시대 유학 당시의 은사 게페르트 신부였다. 그는 1956년에 제자 김수환을 다시 만나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더 공부하려면 독일로 유학을 가라고 권유했다.
독일 유학 시절 김수환이 만난 게 바로 요세프 회프너 신부였다. 그는 젊은 신부 김수환에게 ‘열린 교회 정신’을 주입했다.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회프너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추구하던 교회 현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되고, 끝내 김 추기경과 함께 같은 해인 1969년 추기경 반열에 오른다. 김수환 추기경의 시대는 그렇게 열렸고, 새로운 가톨릭은 대세였다지만 문제는 남는다.
그런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톨릭의 진정한 혁신을 가져왔는가. 아니면 우리 시대 종교의 타락으로 이어져 요즘 세상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가. 물론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 냉정한 잣대에 따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돌격대장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가치판단도 바뀔 것이다. 분명한 건 김수환에겐 빛과 그늘이 함께 있다는 점이다. 무작정 추앙이야말로 그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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