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두어 달 전, 봄이 오는 걸 막아 버리고 말겠다는 듯 날씨가 사납게 심술을 부리던 올 3월 초를 아직 기억하는가, 아니면 혹시 이제 다 지난 일이라 여기며 그냥 묻어 두기로 했는가….
3월4일, 헌법재판소에선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5차 변론이 있었다. 당시 증인으로 출석한 홍 머시기가 “계엄 당일 윤 대통령과 두 차례 통화했다. 대통령이 ‘싹 다 잡아들이라’고 했다”고 하자 윤 대통령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달그림자에 빗대 재판과 수사 과정의 터무니없음을 지적했다.
이 말을 두고 좌파 언론은 일제히 탄핵 심판정에 피고로 나와서 선문답이 웬 말이냐며 비웃고 조롱했다. 하지만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허구임을 느끼고 있던 차에 나온 말이라 어쩌면 그렇게도 딱 들어맞는 표현인가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날 필자는 방송을 통해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문득 아리에타 하나를 떠올렸다. 이탈리아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의 ‘방랑하는 은빛 달이여(Vaga Luna Che Inargenti)’라는 서정 가곡이다. 어째서 한가하게 노래 타령인가 하겠지만 아무튼 그 노래가 생각났다.
“아름다운 달, 강둑과 꽃들을 은빛으로 물들이면 / 세상 만물에 사랑의 숨결 차오르네 // 내 사랑 지켜보는 은빛 달이여, 그녀에게 이 설렘과 탄식 전해 주오, 멀리 있어 아픈 마음 가라앉혀 주오 // 슬픔의 시간을 헤아리는 밤 / 사랑 안에서 내 마음 위로하는 은빛 달이여…”
‘방랑하는 은빛 달이여’의 가사다. 이 곡은 워낙 아름답고 많은 사람이 좋아해서 여러 남녀 가수가 불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카를로 베르곤지나 레나타 테발디가 부른 게 좋다.
테발디는 밤의 매혹을 휘감고 나와 무대를 장악해 버리는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20세기 최고로 꼽히는 소프라노 가수다. 칼라스가 사연 많은 이웃집 여자 같다면 테발디는 기품있고 상냥한 엄마 같은 느낌이 좋다. 단정하고 성실한 것, 맑고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는 보수우파의 취향이다. 본질적으로 보수우파는 에드먼드 버크가 말한 ‘숭고한 아름다움(sublime)’의 가치를 아는 유전자를 품고 있음이다.
이 보수우파가 지금 사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 현상은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며 좌파의 공격이나 음모 때문에 빚어진 것도 아니다. 신념 부족, 정책 싱크탱크의 부재, 게다가 요지부동의 비겁함….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교활한 자들이 득세하며 내부 괴사를 일으켜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다.
6·3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에선 분열로 악재가 속출하고 있다.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끝까지 싸우라며 김문수 후보를 독려했던 홍준표는 하와이로 떠나 버렸고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하면 이재명정부의 총리를 한다는 해괴한 소문도 돈다. 그뿐인가. 한동훈 등은 ‘내란’ 운운하며 윤 대통령의 출당을 요구하더니 윤 대통령이 탈당하자 마지못해 지원 유세 일정을 잡았는데 다시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내란’은 민주당이 내건 프레임이다. 그런데 그 프레임에 걸려들고 싶어 안달하는 멍청한 국민의힘 인간들은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이 모든 난장판으로 국민의힘은 대선 승리의 가능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사를 통틀어 선거에서 한 번 이기고 지는 것이 대세에 별 영향을 미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보수 대표 정당 국민의힘의 정체성 혼란, 그리고 그걸 그저 좌시하는 당원과 지지자들의 무기력함과 비겁함에서 비롯된 보수 진영의 괴사 현상이다.
더 큰 문제는 대선후보 최종 경선에서 한동훈을 택한 국민의힘 당원이 38.75%나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윤 대통령의 출당을 요구하는 목소리 또한 작지 않았다. 당내 분위기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와 판박이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배신을 혐오하는 보수의 DNA가 사라진 자리에 ‘중도’를 외치는 얼치기들이 들어선 보수 대표 정당의 모습…. 참으로 꼴사납다.
핑곗거리가 필요할 때면 국민의힘에선 늘 ‘중도’를 외쳐 왔다. 그런데 그들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중도엔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그리고 정치에 무관심해서 절대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중도만이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자꾸 중도를 외치는 가증스러운 무리가 아직도 국민의힘에선 판을 친다.
그러니 이제 보수는 국민의힘을 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킬 진짜 보수의 새 판을 짜야 할 시점이 온 게 아닐까.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에 김진태 강원특별자치도지사의 말이 깊숙이 와서 꽂힌다.
“범보수 빅텐트 그만하자. 우물 바닥까지 내려간 보수, 우리를 구해 줄 두레박 같은 건 없다. 장렬히 죽겠다는 각오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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