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을 보면 때때로 의문이 든다.
근대 건축의 모토는 ‘탈(脫)과거’다. 고딕·바로크·로코코와 같은 전통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정신과 기술을 반영하려는 흐름이었다. 장식을 버리고 기능을 강조하며, 형태는 구조를 따르도록 했다.
그런데 가우디의 건축은 이런 흐름과 달리 여전히 고풍스럽고 장식적이다. 곡선이 많고, 생명체의 형태를 닮았으며, 종교적 상징도 가득하다. 근대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가우디는 중세 고딕 건축의 ‘정직한 구조’를 사랑했고, 그 구조를 20세기 초의 신기술과 결합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형태만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를 진화시킨 것이다. 아르누보 양식의 곡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철과 콘크리트 같은 당시의 신소재를 실험했다. 그의 건축은 과거를 동경하거나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을 현대적 언어로 다시 말한 것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그의 ‘순수한 의도’다. 그는 유행이나 경제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사람과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건축을 했다. 그는 말했다. “건축가는 창조자가 아니라 자연의 제자일 뿐이다.” 인간의 삶, 자연과의 조화, 종교적 신념이 그의 설계에 스며 있다. 이는 단지 조형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건축을 통해 사람의 ‘정신’을 감싸고자 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건축가가 있다. 김중업이다. 그는 한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로 불린다. 프랑스 유학을 통해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순한 모방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한국적인 건축’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의 건축에는 분명한 태도와 절제가 있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의미는 깊고, 수직과 수평의 긴장은 도시의 풍경을 품는다. 그의 건축은 장엄하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대신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김중업은 “건축은 건물이 아니라 사상이자 실천”이라 했다. 실제로 그의 건축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고, 대중과의 교감을 잃지 않았다. 형태에 앞서 철학을 생각하고, 재료에 앞서 사람을 고민했다. 그는 전문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셈이다. 전문가란 단지 기술이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사람이다.
성숙한 건축가는 시대정신을 읽고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며 그것을 건축물에 담아낸다. 그 결과물은 시간이 지나도 힘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고, 후대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반면 권위주의나 부를 과시하려는 건축, 파시즘적 권력의 상징으로 지어진 건축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허약한 기반이 드러나고 만다.
진정한 건축은 규모에 있지 않다. 커서 위대한 것이 아니고, 작아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진짜 건축은 철학이 담긴 건축이다. 작은 주택 한 채일지라도 사람을 이해하고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건축이다. 반대로 아무리 거대한 건축이라도 정치적 계산이나 과시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건축은 말이 없다. 그러나 훌륭한 건축은 침묵 속에서도 강한 울림을 준다. 사람을 위하고, 시간을 품고, 미래를 향하는 건축은 스스로 말한다. 우리는 그런 건축을 더 많이 만들고, 그런 건축가를 응원해야 한다. 전문가의 순수한 의도에서 출발한 작업은 반드시 다음 시대에 희망의 징검다리가 된다. 김중업과 가우디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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