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끔찍했다. 세상이 지금껏 생각해 왔던 것과 너무나 다름을 깨달아야 했다. 칼 융이 말했었다. 인간의 의식은 생성된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래서 연약하다. 충격을 받으면 쉽게 파열된다. 그랬다. 이 얇디나 얇은 의식의 ‘망막’으로 버텨가기에 너무 끔찍한 현실이었다.
의식과, 사실, 현실 사이에는 언어라는 막이 있어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는 절대 의식 내부로 옮겨올 수 없다는 것, 이 근본적인 한계 속에 환각과 거짓의 뿌리가 놓여 있음을 일 년 내내 곱씹어야 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오래전에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이야기했었다. 원본과 닮은 모사나 재현을 의미하고, 그런데 ‘실제(=실재)’보다 더 ‘실제’처럼 보이는 ‘모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불가능해지고 급기야 시뮬라크르가 ‘실제’를 대체하는 일이 일반화될 수 있다고 했다.
기호와 이미지가 사실과 현실을 대신하는 상황을 이야기한 것인데, 지난 1년만큼 이런 사태를 극명하게 보여준 과정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기야,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인데,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즐겨 음모를 꾸미며, 상식을 믿는, 세종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백성들’은 상식을 지렛대 삼은 이 음모에 ‘가붕개’처럼 넘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끔찍한 시간을 견디고 버티며 먼지 낀 하늘이 새파랗게 맑아지기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쓴 신동엽 시인만큼은 못 되더라도, “먹구름”을, “지붕 덮은 쇠항아리”를 하늘로 알고 사는 어리석음만은 면해야겠다고, 그러려면 내 눈에 낀 “먹구름”을 씻어내고 또 “쇠항아리”를 찢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지난 1년의 비극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연원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기는 끝이 없겠지만, 거금 10여 년 전, 우리 ‘눈앞에서’ 온갖 매스컴들이 바다에서 한 선박이 거꾸로 가라앉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인 듯 생중계를 했을 때, 그런데 생중계라 해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혀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은닉해 버렸을 때, 지난 1년의 비극은 배태된 것이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연약한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의식의 얇은 막은 찢어져 내렸고, 이 갈라진 틈새로 터져나온 절망의 뇌수가 뭉크의 ‘절규’처럼 울부짖는 얼굴로 낭자하게 흘려내렸던 것이다. 이때 이미 모든 사실과 현실은 환각과 전도(顚倒)의 아비규환에 휘말려 버릴 것이 예견되었고, 또 자명하게도 사태는 그렇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 길다면 긴 시간을, 삶을 제대로 정관하며 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충격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아스팔트에서 자기 생애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던 것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먹구름”을 씻어내려 해도 “쇠항아리”를 찢어내려 해도, 돌아오는 것은 음모를 꾸민 자들의 숨어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의 메아리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하나. 모르는 것을 아는 줄 알고, 삶이 환각과 거짓에 휩싸인 채로 덧없이 인생을 허비해야 하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 시뮬라크르 세상에서 음모가 있는지 없는지 무엇을 알겠는가. 혼잣말이요, 허튼소리요, 대낮의 술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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