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테헤란로, 이란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있다. 1977년 테헤란 시장이 방한, 서울과 자매결연을 맺으며 각각의 수도에 서로 거리 이름으로 우의를 다지자고 한 결과다. 테헤란로는 강남역 4거리에서 삼성역까지 왕복 10차선 도로, 서울시는 명명과 더불어 테헤란처럼 선진도시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1977년 당시 이란의 1인당 GDP는 2243달러로 세계 18위. 한국은 국민소득 1000달러 시대를 막 열었던 때다. 친미 팔레비 왕조 체제의 이란은 1970년대 초 석유파동 시 중동 산유국 중 한국에 석유를 공급했던 유일한 나라였다. 오일 머니가 풍부했던 이란은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 입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을 정도였다.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났다. 팔레비 왕가가 비밀경찰 사바크를 동원해 반대세력을 탄압한 데다 여성 참정권 확대 등 급격한 서구화로 이슬람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들의 반발 결과였다. 경제적으로 왕실과 일부 엘리트층에 부가 집중됐고 서민들의 물가고도 혁명 원인 중 하나다.
1979년 11월 팔레비가 미국에 치료차 입국하자 과격파 이란 학생들은 이에 항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했다. 미 대사관원 50여 명이 억류됐다. 미국은 1980년 4월 인질 구출을 위해 ‘독수리 발톱 작전(Operation Eagle Claw)’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사막의 모래 폭풍으로 특공대를 실은 헬기 엔진이 고장났기 때문이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에 대해 "모래알들이 하나님의 군대였다"라고 설파했다.
고무된 이란은 회교 혁명을 수출했다. 이라크는 이란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했다. 이렇게 일어난 전쟁이 1980년 이란·이라크전으로 8년간 지속됐다. 이란 혁명정부는 레바논 헤즈볼라, 가자지구 하마스, 예멘의 후티 반군과 시리아 아사드 독재정권을 도왔다. 반미와 반이스라엘 정책을 추구하면서 핵 개발도 서둘렀다. 여기에 북한이 적극 협력했다.
오죽하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북한 독재 정권과 더불어 이란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묘사했겠나. 이라크 후세인 정권은 멸망했고 이제 이란 차례다. 북한 김정은도 열 살 남짓한 딸 김주애에게 후계자 수업을 시키는 걸 보니 최후를 예감한 것일까.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2위, 원유 세계 4위의 이란이 회교 혁명 수출에 골몰할 때 대한민국은 제품 수출에 매진했다. 테헤란 내 서울로는 2km 남짓 밋밋한 자동차 도로로 남은 반면 지금 강남 테헤란로는 첨단 벤처와 금융 중심지로 변모했다.
“샤(국왕) 만세.” 이란 시위대가 팔레비 왕조의 부활을 외치고 있다. 한·이란 관계가 돈독했던 그 시절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다. 서울이 테헤란로에서 선진화 꿈을 이뤄냈듯이 이젠 테헤란이 서울로의 번영을 꿈꿀 차례다. 한때 우리 드라마 ‘주몽’과 ‘대장금’에 열광했던 이란 국민은 K드라마처럼 역경을 딛고 우리의 협력의 손길을 잡을 날이 올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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