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미세리코르디아(2024)’는 안개 낀 가을숲 같은 영화다. 그 음습한 숲에는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처럼 다채로운 사랑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사랑의 중핵에는 욕망이 있고, 욕망은 일종의 사랑이다. 라틴어 제목인 연민(misericordia)마저 어떤 의미에서는 타인을 너무 사랑해 그(녀)의 고통을 달래려는 욕망의 발현 아닌가. 영화 곳곳의 예수 조각상이 돋보이는 이유다. 고통을 겪는 인간의 죄악과 십자가형을 통해 죽음으로써 온 죄인을 구원한 예수의 크나큰 자비.
‘미세리코르디아’는 인물들의 애욕이 죽음을 매개해 표출되고 뒤엉키는 양상에 주목할 때, 그 요체가 정확히 파악된다. 영화 속 사랑이 죽음을 토양 삼아 무럭무럭 자라는 버섯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장 피에르 리갈의 죽음이 계기가 돼 마르틴은 제레미를 욕망하고, 제레미가 숲속에서 뱅상을 죽인 사건이 발판으로 작용해 필리프는 제레미를 향한 자기 사랑을 표현한다. 영화에서 죽은 둘이 부자 관계임을 생각할 때, 뱅상의 시신이 묻힌 곳에서 버섯이 자라는 것은 상당히 의도적인 연출로 판단된다. 버섯이 남근의 상징적 이미지를 쉽게 떠오르게 해서 그렇다. 그러므로 남성 캐릭터들 간의 사랑 관계를 세세히 살펴보는 작업이 요긴하리라.
제레미는 고인을 잊지 못하고 연모하는 상태다. 그가 수영복 삼각팬티만 입은 사자의 생전 모습이 찍힌 사진을 몰래 보는 장면은 사랑의 깊이를 드러낸다. 망자의 시신이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것은 영화의 심층에 자리한 아버지가 근원적 남성으로서 지니는 무게를 현시하는 대목이다. 한편, 제레미는 동성 친구인 왈테르에게도 성적 관심을 보인다. 제레미가 왈테르의 속옷을 입고 그의 가슴을 더듬는 장면은 제레미의 성 정체성을 뚜렷이 나타낸다.
그런 제레미를 관음하면서 사랑을 키우는 이가 바로 필리프다. 필리프의 대사는 퍽 흥미롭다. 그가 장례 미사를 주재하면서 설교하는 내용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기독교인에게 사랑은 영원하고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사랑과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라고 설교한다. 이 설교는 평범한 기독교적 교훈인 듯하나,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적실히 압축한 언명으로 해석되기에 손색이 없다. 뱅상의 피살이 필리프가 제레미에 대한 사랑을 표출해 제레미를 살인죄 혐의로부터 구제하는 조건으로 기능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제레미와 필리프의 고해성사 씬은 또 다르게 압축적인 주요 장면이다. 고해성사가 은밀한 환경에서 성적 고민을 포함한 뭇 사연을 수다스럽게 털어놓도록 허용하는 고백 장치로 기능함을 헤아리면, 이 고해성사 장면이 한층 중층적인 긴장감을 내포함을 느낄 수 있다. 필리프가 제레미의 뱅상 살해를 목격했음을 알릴 뿐만 아니라, 제레미를 향한 필리프의 성적 호감을 은연중에 암시하기 때문이다. 필리프는 뱅상 살해범을 신고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 살해범이 감옥에 갇혀 겪을 괴로움까지 염려한다. 이 고백은 필리프가 매 순간 제레미를 지켜보고 있었음도 의미한다는 점에서 자못 놀랍다.
제레미가 투신자살을 망설이는 중, 필리프가 그런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자살 기도를 멈추고 자신을 위해 살아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은 그래서 재고될 만하다. 이 장면은 다소 작위적인 우연에 의존하는 장면으로 지적될 수 있다. 물론, 인위적 연출의 느낌도 있으나, 제레미를 향한 필리프의 순정한 사랑과 시선을 떠올리면 개연성을 수긍할 만한 지점도 어느 정도 있다.
설득력이 다소 약한 장면이 따로 있다면, 제레미를 의심한 경찰이 밤중에 그의 방에 몰래 들어와 심문하는 장면이 오히려 그런 약점을 품었다고 여겨진다. 여러 논리적 절차를 생략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경찰의 두 번째 급습에서는 마르틴이 집 열쇠를 주었다는 정보가 제공되지만, 그 이전의 첫 습래에서는 침입의 구체적 방법이 드러나지 않는다. 제레미를 의심하던 경찰도 그와 필리프가 필리프의 침실에 자체로 함께 잠든 현장을 보고 물러나지만.
그렇게 경찰의 눈을 따돌리고 뱅상의 시체를 땅에서 꺼내어 빼돌리는 시퀀스에서는 또 하나의 장면이 눈에 띈다. 바로 필리프가 죽은 뱅상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장면이다. 보통 시체를 보면 공포나 섬뜩함을 느끼기 쉽지 않은가. 왜 필리프는 죽은 뱅상의 얼굴을 여러 번 매만져 준 것일까. 그 이유를 뱅상이 영화에서 지니는 특수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뱅상은 (죽은) 아버지의 (죽은) 아들이다. 예수도 아버지의 죽고서 부활한 아들이었다. 필리프가 신부임을 고려하면, 성직자로서의 정체성이 죽은 뱅상에 대한 연민을 촉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자비의 욕망은 제레미에 대한 성애의 욕망과는 변별된다.
또한, 제레미가 뱅상에게 표출하는 욕망도 특이하다. 제레미가 다른 남성에게 표하는 욕망이 성애의 욕망이라면, 그가 뱅상에게 토해낸 욕망은 뱅상을 끝내려는 살인의 욕망이다. 왜 제레미는 뱅상에게 분노와 증오의 욕망을 느꼈을까? 그 이유도 뱅상이 아버지(와 마르틴)의 아들임에 놓일 터이다. 엔딩에서 제레미는 마르틴과도 애정의 교섭을 나누는데, 아버지를 대결 상대로 놓고 어머니 마르틴을 차지하려는 무의식적 리비도를 지닌 아들 뱅상이 제레미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제레미와 뱅상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미세리코르디아’는 남성들과 한 여성 간의 복잡한 욕망을 다룬다는 점에서 프리츠 랑의 영화 ‘인간의 욕망(1954)’과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도 연상시킨다. 전자는 제프가 비키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돼 그녀가 남편 칼의 살인에 동조하게 된 경위를 거짓 증언으로 은폐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후자는 부인과 사별한 마티유가 하녀 콘치타를 사랑해 그녀에게 구애하는 이야기를 기묘한 유머 감각으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와는 미묘히 구별된다. 이 스산한 그늘숲에서는 한층 어두운 애욕들이 뱀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꿈틀거린다.
영화 ‘미세리코르디아(2025)’ 줄거리
제레미는 장 피에르 리갈의 부고를 듣고 고향으로 와 망자의 부인 마르틴의 권유로 마을에 머물게 된다. 제레미는 친구 뱅상을 죽이게 되나 필리프 신부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한다.
알랭 기로디 감독 소개
알랭 기로디는 영화 ‘호수의 이방인(2013)’에서도 남성 동성애자의 사랑과 살인을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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