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소통문화아카데미 이사장(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스카이데일리
같음과 다름의 각 문제에는, 수평주의와 수직주의의 문제도 함께 들어 있다. 먼저 다름을 보기로 하자. 함께의 맥락에서 같음과 다름을 묻는 우리는, 두 종류의 다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함께이려’ 하는 수평주의적 다름, ‘다름1’과 ‘따로이려’ 하는 수직주의적 다름, ‘다름2’가 그것이다. 질서에서 ‘따로 속의 만남’ 혹은 ‘만남 속의 떨어짐’의 제 맥락들을 엄밀하게 계속 묻고 따지면서, 이런 질서를 넘어서려는 이론과 실천이 중요할 것이다.
수직주의적, 획일적 차이를 넘어, 수평주의적, 다원적 차이로 향하는 일은 수직주의적, 획일적 조화를 넘어 수평주의적, 다원적 조화로 바꾸는 일로 이어진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차이1’과 ‘차이2’ 사이의 개념 차이를 명료하게 표현하려 했다. 앞의 수직적 차이는 ‘차이2’로, 뒤의 수평적 차이는 ‘차이1’로 이름 짓고, 앞의 수직적 조화는 ‘조화2’로, 뒤의 수평적 조화는 ‘조화1’로 명명하여 그 동이를 드러내려 했다.
같은 논리로, 같음에서도 함께이려 하는 수평주의적 같음, ‘같음1’과 따로이려 하는 수직주의적 같음, ‘같음2’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작은 만남과 소통의 크기에서 따로이려 함은, ‘따로 속 함께’ 내지 ‘함께 속 따로’이려함을 뜻하고, ‘다름2 속의 같음2’ 내지 ‘같음2 속의 다름2’를 뜻한다. 이는 하나의 ‘떨어지려는 만남’ 내지 ‘외로운 함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같음2와 다름2나 같음1과 다름1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고 결과하는 관계라 할 것이다. 나아가 ‘따로’도 획일적 따로, ‘따로2’와 다원주의적 따로, ‘따로1’을 구분하고, ‘함께’도 획일적 함께, ‘함께2’와 다원주의적 함께, ‘함께1’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같음과 다름, 함께와 따로가 어떤 맥락에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하늘과 땅의 차이, 천양지차(天壤之差)를 보일 수 있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말하는 ‘따로 속 함께’도, 엄밀히 말하자면, ‘좋은 따로’ 속의 함께와 ‘나쁜 따로’ 속의 함께로 더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함께의 모습과 크기의 문제인데, 1과 2는 수평과 수직 혹은 획일성과 다양성의 구분이고, 이는 좋음과 나쁨, 큰 크기와 작은 크기로 약간 도식화한 것뿐이다.
보시다시피, 같음과 다름이 나와 너, 나들과 너들의 만남과 소통, 함께의 방식과 태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런데 이 같음과 다름은 위에서 본 것처럼, 사실(實)에서 갈라지기 때문에 말(名)에서도 1과 2로 나뉜다. 따라서, 필자도 필자지만, 복잡하게 나뉘는 사실들이 말과 개념의 복잡한 나뉨을 강요하는 면이 크다 할 것이다.
이런 차이는, 간단히 말한다면, 지향할 것과 지양할 것의 차이라고도 할 것이다. 현실로 들어가면 훨씬 복잡하게 전개될 이런 문제는, 이 정도로 그치자. 더 나아가면, 이 책을 덮으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어떻게 매 번 1과 2로 구분하여 말하고 쓰겠느냐고 할 수 있지만, 다행히도 콘텍스트, 맥락이 이해에 필요한 정보의 대부분을 말해줄 뿐 아니라, 현명하신 독자님들은 이런 맥락을 짚으실 줄 알고, ‘더 혹은 다’ 생각하실 줄 안다.
덧붙여 말하자면, 수직적, 수평적 같음과 다름들은 다양한 강도와 모습들이 있다. 말하든, 듣든 혹은 실천하든, 모든 경우에서 구분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차이를 구분하기의 필요성이나 중요성 정도는 지금까지의 논의가 충분히 말해졌다 할 것이다.
‘떨어지려는 만남’ 혹은 ‘밀어내는 함께’ 내지 ‘외로운 함께’, ‘겉도는 함께’는, 수직주의적 함께 내지 소외된 사회화 질서의 핵심논리라 할 것이다. 이는 ‘다 함께 그러나 분리 속에서’(合而分) 내지는 ‘분리 속에서 그러나 다 함께’(分而合)의 논리다.
물론, 여기에서 분리는 수직적 분리(분리2)이지 수평적 분리(분리1)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Bourdieu, 1930~2002)가 ‘철저한 형식주의를 통해 친밀함의 유혹을 영원히 떨쳐버리려는 부르주아적 예의범절에서도, 의사소통 자체의 핵심 안에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태도가 은폐되어 있는 사실’을 말할 때, 이는 ‘따로 속 함께’로 이어진다 할 것이다.
필자의 원고에서 다름은 주로 긍정적으로 쓰여 ‘다름1’을 의미했고, 같음은 주로 부정적으로 쓰여 ‘같음2’를 의미했음을, 독자님들은 이미 짐작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만남과 소통의 큰 크기인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같이’를 말할 때, 다름과 같음은 모두 ‘다름1’, ‘같음1’을 의미한다. 또, ‘나도 사람 너도 사람’에서도, 이는 ‘나와 다른 너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니까, 이는 ‘다름1 속 같음1’을 말한다.
‘현대’를 말하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하버마스(Habermas, 1929~ )는 ‘상호주체성’(Intersubjektivitat) 개념과 함께, 소통하는 사람들에서 열음을 말하지만, 소통의 과정에서 규범을 중시하며 결과에서는 하나, ‘합의’(Konsens)의 같음을 지향한다.
하지만, ‘반이성’(Paralogie)과 ‘반대싸움’(Widerstreit)을 지향하는 ‘탈현대’의 프랑스 철학자 료타르(Lyotard, 1924-1998)에게, 소통에서 여럿 혹은 ‘비합의’(Dissens)의 다름이 중요하게 된다.
위에서 필자는 이런 같음과 다름이 서로 밀어내는 만남이 아니라, 서로 살려주고 기워(補)주는 만남이 필요하고 가능함을 말했다. 이런 방향은 합의(合意)와 비합의 내지 ‘분의’(分意)를 종합 혹은 지양하려는 한 태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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