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소통문화아카데미 이사장(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스카이데일리
‘이통치통’에서 앞의 ‘통’은 물으며 반성하는 소통의 통이다. 그 기초는 문제를 묻고 드러내고 넘어서는 방법에 대하여, 문제의 당사자들이 ‘같이 생각하기’에 있다.
같이 생각하기는 다름들의 함께를 전제하는데, 이 다름들은 ① 소통문제 당사자들 사이, ② 이 당사자들과 매개자들 사이의 그것이다. 매개자들은 이론적 실천적 전문가들을 칭하며, 이론은 소통에 대한 다양한 학설들이나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다양한 교양까지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소통의 장에서는 소통의 좋은 방법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소개받으며, 이에 대해 함께 생각을 열고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매개하는 전문가들은 문제의 직접적인 당사자들은 아닐지라도, 이 분야를 전공한다는 뜻에서 또 하나의 당사자들일 수 있다.
이론이나 연구결과들을 정해진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맥락 없이, 현실 없이, 관심 유발 없이 건조하게 소개하거나 전달한다면, 그 의미와 효과는 뚝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학문인은 이론에 강하고, 일반인은 현실에 강할 수 있다. 한쪽은 현실을 만날 기회가 적었으며, 한쪽은 이론을 접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실천 당사자들’은 이런 ‘이론 당사자들’의 다른 시각과 깊이, 넓이를 소통의 장으로 끌어들여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 만남은 서로의 강점과 약점을 서로 알리고 알면서, 서로의 다름에서 서로의 강점들을 배우고 가르쳐 주는 계기일 것이다. 이런 다름 만남의 효과는 ① 학문인과 일반인 간은 물론, ② 다양한 경험과 관심의 일반인들 간이나, ③ 다양한 학문 간, 전공 간, 세부전공 간, 방법론 간에도 해당될 것이다.
이때, 다름들이 수직적이고 일방적이고 수동적으로 ‘잘못’ 만나면, 쥐죽은 듯한 조용함이나 전쟁터 같은 시끄러움 속에서, 상대를 누르고 발목을 잡거나 마구잡이로 싸우는 만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평적이고 이성적이고 창조적으로 ‘잘’ 만나면, 서로 살림과 서로 키움, 서로 기움의 풍성한 계기로 될 것이다.
생각을 나눌 때 생각이 바뀐다면, 이는 단순히 내 생각이 너에게로 가고 네 생각이 나에게로 오면서, 서로 자리를 바꾼다는 의미는 아니라 했다. 내 생각이 너한테 갔지만, 내 생각은 여전히 나에게도 있다. 네 생각이 나에게 왔지만, 네 생각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함께’와 ‘나눔’을 함께 말한다. 그리고 네 생각을 받은 내 생각은, 받은 만큼만 커진 것이 아니라, 이 생각을 만나면서 종합(綜合, synthesis)하는 속에 또 다른 생각이 생기면서 더 커질 수 있게 된다.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이 만나면서 둘이 멀뚱멀뚱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제3의 새로운 종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은, ‘멀뚱-마주’에서조차 뭔가는 오간다.
진정성 속에서 다름들이 자유롭게 만나고 소통하는 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열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같음과 나를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다름과 남을 더 이해할 수 있고, 이런 ‘다름과 남’으로써 ‘같음과 나’의 생각크기와 소통크기를 키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같음과 나로, 다시 다름과 남의 생각크기와 소통크기를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나와 남들이 함께 생각을 열고 나누고 섞을 수 있는 곳에서, 나 홀로는 못하는 생각이나 질문 혹은 답을 남들이 할 수 있으며, 남들이 홀로 할 수 없는 이것들을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없음과 있음이 만날 수 있는’ 계기다.
나와 남은 경험이 다르고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유전형질도 다르기 때문에, 외모는 물론, 생각이나 가치 등 내모도 같을 수 없다. 다름에 생각을 ‘열 수’ 있을 때, 다름과 생각 나눔이 가능하게 되고, 생각을 열고 나누는 사람들 서로의 생각 키움이 가능하게 된다.
혹은 다름과 생각을 ‘나눌 수’ 있을 때, 다름에 생각이 더 열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생각을 나누고 여는 사람들 서로의 생각 키움이 가능하게 된다. 혹은 다름으로 생각을 ‘키울 수’ 있을 때, 다름에 생각 열음과 생각 나눔이 빨라진다.
이 셋은 서로를 전제하고 결과하는 관계이지만, 기본명제는 ‘생각 나눔은 생각 열음을 전제
하고 생각키움을 결과한다.’ 내지는 ‘생각 열음은 생각 나눔을 결과하고 생각키움을 결과한다.’일 것이다.
이통치통의 방법으로 ‘합리’적인 생각의 열음과 나눔 속에, 합리적인 소통의 방법이 모색될 것이며, 이렇게 찾아진 방법은 생각의 열음과 나눔의 크기를 계속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함께 생각하고 같이 생각하는 다름들의 창조적 융합(fusion)이다. 이는 함께이면서도 스스로 독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 독창과 함께가 여기에서 함께할 수 있다. 이는 독창과 함께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키워줄 수 있는 방법이다.
이에 반해, 제도와 관습에 힘입어,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올바름, 합리, 정의 등 ‘좋은 것들’을 내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은, 일종의 ‘같은 생각하기’이다. 수직적인 소통문화에서, 이런 ‘남들’이 나를 알고 이해(理解)하기도 어렵지만, 나를 안다고 해도, 나의 관심을 포함하여, 결정되는 당사자 모두의 관심과 이해(利害)를 대변하기는 어렵다.
결정권을 가진 남들이 하나의 ‘완성된 해답’을 찾아 결정하고 제시하는 방식에서 제도와 이데올로기가 끼어드는 여지나 막힘, 닫힘, 비틀림의 여지가 허용되면서, 소외와 배제가 생겨날 가능성이 커진다.
‘같이 생각하기’는 다양한 경험과 생각들을 서로 열고 나누면서 활발하게 키워나가는 일이다. 이에 반해, ‘같은 생각하기’는, 여럿이지만, 이들의 생각을 일제히, 하나의 같은 생각으로 통일하기이다. 이 여럿은, 말하자면, ‘하나인 여럿’인 셈이다.
고정과 일제, 제일 혹은 일방 속의 같은 생각하기에서, 우리들의 세상크기, 사람크기를 훌쩍 키워줄 수 있는 참신한 생각들이 활발하게 피어날 수는 없다. 도끼(斤)로 갓 자른 나무의 싱싱한 단면의 형용이, 진부(陳腐)의 반대 참신(斬新)이 아니던가?
‘같이 생각하기’와 ‘같은 생각하기’의 만남과 소통의 방식에서, 우리는 같음과 다름, 수직과 수평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같은 생각하기는 여럿이 부담 없이 서로 다른 생각들을 보내고 받으면서 활발하게 소통하기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같이 생각하기’와 ‘같은 생각하기’는 제도와 관습, 문화 등 세상크기가 크게 좌우하는 문제이다. 주입식 교육제도나 수직주의적 예문화 전통 등에 젖어, ‘같이 생각하기’의 기회가 별로 없는 우리들의 작은 세상크기가 소통의 크기, 함께의 크기에서 주된 문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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