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 혹은 사고를 뜻하는 idea에 접미사 ‘-ology’가 결합해 만들어진 이 단어의 쓰임새가 본격화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이데올로기란 이념 혹은 사상을 뜻하며, 많은 경우 사회체제 전반을 지배하는 거대담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이러한 쓰임새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는 19세기 독일의 사상가 칼 맑스였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종교와 비슷한 효과를 갖는 것으로 분류했고, 근본적으로는 일종의 ‘허위의식’으로 간주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는 현실의 사회적 모순이 낳은 고통을 잊게 하는 환각 효과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제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현실에 발 딛고 있는 계급적 조건들이 그의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 요소라는 뜻이다. 요컨대, 19세기의 유럽 신흥 부르주아들은 상업과 산업의 팽창이 인류 삶의 진보와 풍요를 가져올 거라 믿었다. 그들의 눈에 세상은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풍요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시대에 아동노동의 착취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된다는 점, 아프리카 흑인노예 노동이 비인도적 폭력에 기반해 남용된다는 점을 인정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 사례들이 말하는 바는 명료하다. 인간은 자신들의 진정한 현실을 직면하기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며, 이때 자기기만의 환영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 환영의 이미지가 바로 19세기의 맑스가 바라본 이데올로기의 개념이었다.
관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맑스가 처음 타기팅한 것은 19세기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들이었다. 세상을 관념의 추상적 세계에서 그려내고자 한 헤겔주의자들에 맞서 맑스는 세계의 물질적 조건들에, 혹은 그 물질적 조건으로 인해 빈곤에 빠진 대중들의 움직임에 주목하고자 했다.
관념 대 물질의 대립구도는 19세기 중반 유럽 지식인들에게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다. 현실세계에서는 이미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신분제를 타파한 대혁명이 일어났고, 영국은 산업혁명의 추동력에 의해 물질적 현실세계의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흐름들은 이웃나라인 독일에도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와 영국으로 망명생황을 이어간 맑스는 이 변화의 흐름에 심취하게 된다.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관념론은 세계를 묘사하고 해석한다. 그런데 그 묘사된 세계가 준거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이기도 하고, 일부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헤게모니 체제이기도 하다.
맑스가 보기에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현실의 모순들이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이 현실로부터 도피한 채 관념의 세계에 매몰되었다.
허위의식 vs 물질적 힘
그 관념의 세계는 일종의 도피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도피처의 목록들은 앞서도 봤듯 종교나 기타 다양한 세계관들을 아우를 수 있다. 맑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념의 핵심은 그것이 물질적 현실을 외면케 하는 일종의 환각제라는 것, 즉 허위의식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노력하면 모두가 정당하게 성취할 수 있을 거라는 교육을 받는다. 물론, 이는 터무니없는 허위의식의 전형적 사례다. 건물주가 꿈이 되는 나라는 노력보다는 상속을 더 중요시하고, 자유와 행복보다는 생존을 더 중요한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기만들이 어떻게 오랜 세월 존속할 수 있었느냐 하는 데 있다.
20세기 중반으로 넘어오며 맑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일정한 개념적 조정을 겪게 된다. 이를 행한 대표적인 이가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이때 ‘개인’이란 그냥 특정한 이름도 존재의미도 명확히 갖지 않은 익명의 존재를 뜻한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 들어서기 전에는 그냥 뼈와 살을 가진 동물들일 뿐이다. 숨 쉬고 먹고 자는 일만으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분리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그를 인간세계 속의 한 캐릭터로 혹은 주체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원시부족들 중에는 부족장의 아들이 막 태어날 때, 차기 부족장을 계승할 그 아이를 위해 축제를 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 말도 할 줄 모르는 그 아이는 이미 ‘차기 부족장’이 된 셈인데, 이후 말을 배우고 부족 내 관계들을 익혀가는 과정에서 그 아이는 ‘부족장’스러운 모습을 강박적으로 내면화하게 될 것이다.
비슷한 것은 성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살아가도록 세계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 세계의 요구들이 곧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는 익명의 한 존재를 특정 정체성을 갖는 주체로 호명한다. 이 말은 이데올로기가 물질세계를 외면케 하는 허위의식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이데올로기들이 물질세계가 작동하도록 인간 개인들의 선택들을 강제한다. 그것은 허위의식을 넘어,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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