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을 조촐하게 하고, 잰 말을 삼가며, 남을 업신여기며 자신을 뽐내지 마라. 몸이 비천하고 처지가 곤란하다 하여 주눅 들어 번민하지도 마라. 뽐냄은 교만을 늘리고 번민은 부끄러움을 더한다.”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던 조선 후기 학자 이만부가 자신의 호를 따서 제목을 붙인 책 ‘식산집’ 중 스스로를 단속하기 위한 생각을 정리해 놓은 ‘지명잠(知名箴)’에서 한 말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외유내강’ ‘청빈검약’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것’ 등을 기본 덕목으로 삼아 생활했다. 그래서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부유한 경우에도 그것을 뽐내고 과시하는 것을 천하다 생각했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선비들은 화초를 기르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반려동물을 아끼며 산과 들을 찾아 경치를 즐기기도 했고, 집에 대한 취향을 논하며 집 짓는 일에 공을 들인 사대부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 사대부는 집을 지을 때도 화려한 장식이나 큰 규모보다는 질박함과 단아함을 지향했다. 같은 동북아 문화권에 속하면서도 한옥이 중국·일본의 전통가옥과는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게 된 연유다. 조선 사대부는 장소의 높낮이와 방향을 가려서 터를 정하고 가족의 생활공간인 안채와 남자·손님을 위한 사랑채를 구분해서 집을 지었다. 그래서 남에게 보이는 집의 품격은 주로 사랑채의 풍모로 결정되었다.
사랑채가 아름다운 집으로는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백의정승’ 윤증의 고택이 첫손으로 꼽힌다. 윤증의 호 ‘명재’를 따서 ‘명재고택’으로도 불리는 이 집은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능선 끝에 높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랑채를 지어 정면을 향하게 했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담장이 없이 집 밖으로 툭 튀어나온 형태로 지어서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장소라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또한 사랑채 끝에 누마루가 있어서 품격을 더한다.
이 집에는 여느 한옥과 달리 우물이 없다. 대신 집 앞의 연못 옆으로 작은 향나무 숲 안쪽에 정갈한 샘터가 있어서 우물을 대신하게 되어 있다. 샘터와 연못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생활공간인 안채로 통한다.
명재고택은 윤증이 지은 게 아니라 수십 명의 제자가 돈을 모아 정성으로 지은 집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다양한 생각이 반영되어 곳곳에 독특한 구조와 장치들이 숨어 있다. 그러나 막상 완공된 집을 본 윤증은 자신에게 과분하다며 원래 살던 초가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
윤증은 조선 중기 숙종 때의 문신이다. 장희빈이 사사될 때 “세자를 슬프게 해선 안 된다”며 숙종을 만류한 그는 서인에서 갈라져 노론과 맞선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서 학문에만 몰두해 ‘백의정승’이란 별명을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윤증의 숙부인 윤문거의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이 지난 대선 때 종종 회자되기도 했다. 그런데 후손인 윤 대통령의 건축물에 대한 생각은 윤증과 많이 다른 것 같다.
윤 대통령은 어려운 경제상황 극복을 위해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겠다고 했다. 그래서 2023년 예산을 편성하며 방만해진 정부 살림살이를 다이어트하는 긴축재정을 기조로 삼았다. 또한 예산액 중 중앙정부 가용재원의 97%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비용으로 쓰겠다고 했다. 든든하고 훈훈한 소식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얼마 전 대통령실이 영빈관 신축을 위한 예산 878억여원을 책정한 것이 알려졌다. 대통령실은 “내외빈 행사를 국방컨벤션센터 등에서 열었으나 국격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누가 그런 평가를 했다는 건지 몰라도 우리의 국격이 그깟 건물 하나의 규모나 화려함으로 정해진다는 말인가. 접객을 위한 장소는 치장의 규모가 아닌 주인의 존재로 품격이 사는 법이다. 대통령실은 조선 선비의 옛집과 그 사랑채를 떠올려 보기 바란다.
논란이 일자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계획을 철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엎질러 놓은 물을 야당에서 그냥 넘어가 줄 리가 없다. 영빈관 문제를 계속 물고 늘어져 앞으로도 당분간 논란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8월엔 한 달 내내 초등학교 입학연령 하향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교육계는 물론 국민 전체의 의견을 물어야 하는 예민한 정책이었음에도 졸속으로 추진한 결과 교육부 장관 사퇴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한 달이나 되었을까, 이번엔 영빈관 신축 문제다. 이 또한 긴축재정 상황에서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므로 의견수렴이 필요한 일이었다.
윤 정부는 앞으로 무슨 일이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일은 결정을 하기 전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의견을 구하도록 하라. 대통령과 새 정부가 잘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에 더 이상 찬물을 끼얹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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