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옛 노동리고분(사적 제38호)에 소재한 봉황대(150호분)는 대릉원의 신라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원형의 홑무덤인 봉황대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봉분은 지름(길이)이 동서 83.9m, 남북 82.2m이며 높이는 동서 20.4m, 남북 21.1m이다. 원형임에도 불구하고 지름과 높이가 방향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은 무덤 내부가 무너져 내려 봉분이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봉황대는 단일 무덤으로는 황남대총보다 크다. 황남대총은 지름 80m의 두 개 무덤을 붙인 쌍무덤이다. 봉황대는 아직 발굴 조사하지 않은 고분이다.
조선시대 봉황대 인식
봉황대의 이름은 어떻게 해서 붙여졌을까? 봉황대가 문헌 기록에 나오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 중기이다. 경섬(慶暹)의 ‘해사록’(1607년)과 강홍중(姜弘重)의 ‘동사록’(1627년) 등에 나온다. 두 사람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 경주에 들러 봉황대에 올라간 사실을 전한다. 특히 김세렴(金世溓)은 일본 사행(使行) 일기인 ‘동명해사록’(1636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봉황대는 홍살문 밖에 있는데 높이가 수십 장(丈)이며 흙을 쌓아 만든 것이다. 비슷한 것이 성 남쪽에 열 개 정도 있으며 옛 도읍은 봉황대 남쪽에 있다.’
이처럼 당시의 봉황대는 무덤이 아닌 마을 주변을 조망하기 위해 흙으로 쌓아 만든 관망대 정도로 인식한다. 그래서 봉황대를 비롯하여 경주의 큰 무덤들은 모두 봉황대의 이름을 가졌다. 큰 봉황대, 작은 봉황대, 쌍둥이 봉황대, 서봉황대 등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부터는 여러 봉황대를 관망대가 아닌 무덤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집’(1867년)이다. ‘조산(造山)이 하나 무너졌는데 석축이 나온 것으로 보아 왕릉이 확실하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여러 봉황대는 비로소 신라 고분으로 자리매김한다.
봉황대는 자비왕의 무덤 갈천릉
봉황대는 누구의 무덤일까? 자비왕의 무덤이다. ‘신라사초’는 자비왕릉을 갈천릉(葛川陵)으로 소개했다. <소지명왕기>이다. ‘원년(서기 479년) 토양 기미 4월, 태왕(자비왕)을 갈천(葛川)에 장사지냈다. 파호(巴胡) 태상이 따라 죽으려 하자 왕(소지왕)이 만류해 금지시키고 단지 늙은 몸종 5명을 따라 죽게 허락했다(元年 土羊 己未 四月 葬太王于葛川 巴胡太上欲殉之 王扶止之 只許老媵五人).’
갈천릉이 소재한 갈천(葛川)은 황남대총이 있는 옛 황남리고분과 봉황대가 있는 옛 노동리(노서리 포함)고분 사이를 가로지르는 지금의 태종로(太宗路)이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복개(覆蓋)공사 이전의 갈천의 모습이 선명히 나타나 있다. 갈천은 쪽샘(황오리고분 소재)에서 발원해 형산강(서천)으로 흐르는 용천천(龍泉川)인 소하천이다. 또한 기록은 늙은 몸종 5명을 순장한 사실도 적고 있다. 아마도 훗날이라도 봉황대를 발굴하게 되면 반드시 순장자 인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왕은 서기 479년(자비왕 22년) 2월3일 66세로 사망한다. 특히 ‘고구려사략’은 사망 사유를 밝히고 있다. <장수대제기>이다. ‘장수46년(서기 478년) 무오 10월, 자비의 도성에 큰 지진이 발생해 자비 역시 흙에 깔렸으며 깔려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다. 황상(장수왕)을 배반한 벌을 받은 것이다(長壽四十六年 戊午 十月 慈悲都城大震 慈悲震壓其地 壓死者數百人 背皇之罰). 장수47년(서기 479년) 기미 2월, 자비가 지난해(478년) 지진으로 무너진 흙에 깔린 이래로 극심하게 앓다가 이달 3일에 죽었다(長壽四十七年 己未 二月 慈悲因去年震壓 以來疾劇 是月三日歿).’
자비왕은 서기 478년 10월 수도 경주에 발생한 큰 지진으로 인해 흙에 깔려 몸을 크게 상했으나 이를 회복하지 못하고 479년 2월에 사망했다.
갈천릉 장지 설정의 시사점
자비왕이 갈천 이북의 옛 노동리고분에 무덤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갈천 이남의 황남대총(눌지왕릉)이 소재한 옛 황남리고분(대릉원 지구)에 더 이상 왕릉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일대는 눌지왕과 직계가족의 능원이 들어서며 사실상 포화상태에 이른다. 자비왕으로서는 자신과 직계가족이 묻힐 새로운 능원이 필요하여 자연스레 갈천 이북의 땅을 장지로 선택하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자비왕릉이 들어서며 옛 노동리, 노서리고분 지구는 새로운 능원으로 자리 잡았다. 마립간 후반기 왕인 자비왕, 소지왕, 지증왕과 그의 직계가족 대부분이 이 능원에 묻혔다.
옛 노서리고분의 봉황대(150호분)는 자비왕의 무덤 갈천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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