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을 기리는 현충일로 제정된 6월6일은 원래 친일청산이라는 숭고한 기치를 내걸었던 반민특위가 이승만정부에 의해 해체된 슬픈 날이었다. 지금까지 정부 주관 행사가 없었다 보니 대부분 국민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며, 소수의 뜻있는 의인들만이 그날의 의미를 기리고 있다.
현충일의 경우처럼 국경일이 된 10월9일 한글날 때문에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날이 하나 있다. 그날은 다름 아닌 경술국치에 버금가는 치욕적인 을미참변이 일어났던 날, 즉 1895년 10월8일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간 날이다.
6월6일의 반민특위처럼 10월8일도 지금까지 정부에서 추모식도 성명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두 날 모두 일본제국주의와 관련 있기에 더욱 씁쓸해진다. 게다가 대부분의 언론도 침묵했는데, 이러한 사회현상을 보며 “과거를 잊어버린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라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최근 그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치권에서 친일 논쟁이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발단은 4일 북한이 일본 상공을 통과하는 중거리 탄도미사일 1발을 쏜데서 기인했다. 비행거리 4500㎞, 고도 970㎞, 속도 마하17로 탐지되었다. 이에 발끈한 일본이 미국을 움직여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이 동해상에서 실시됐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아직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데다가, 헌법상 자위대는 일본을 방어하는 작전은 가능하지만 외국과의 교전이나 공격은 할 수 없게 되어 있음에도 최근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을, 그것도 독도 근처에서 실전공격훈련으로 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은 우리 정부가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인정하는 행위라고 날을 세우고는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를 단 일본군 자위대가 한반도에 진주할 날이 올 수도 있다면서 정부의 친일 행위를 강하게 질타했다.
이번에는 국민의힘 정진석 비대위원장이 나섰다. 한글날 연휴가 끝나고 11일에 그는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라고 운을 떼고는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져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한 적이 없다”라는 이상한 말을 꺼냈다.
아울러 “조선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라면서 “일본은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쓰러져 가는 조선왕조를 집어삼켰다. 조선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며 일본의 침략행위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러자 당내에서 라이벌 구도에 있는 유승민 전 의원이 나서서 정 위원장의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발언에 대해 “임진왜란·정유재란은 왜 일어났나? 이순신·안중근·윤동주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나?”라고 반문했다.
정말로 정 위원장의 말대로 일본이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와 전쟁한 것은 조선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일까? 조선왕조는 일본과 상관없이 스스로 망한 다음에 일본이 주워간 것일까? 과연 그런지 아니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1895년 을미년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망해 가는 조선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이용하려 했다. 동학농민봉기로 야기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명성황후는 잔혹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폈다. 이에 난관에 봉착하게 된 일본은 최대의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지시를 이노우에 전임공사로부터 전달받은 미우라 공사는 1895년 10월8일 일본 지식인들과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건청궁(乾淸宮)의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죽였으며 시신은 증거인멸을 위해 불태웠다. ‘에조 보고서’로 밝혀진 시해 과정은 참으로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이며 참혹하기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들 모두 재판에 넘겨졌으나 일본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어 명성황후는 일제의 압력으로 폐서인되었다가, 다음 날 다시 빈으로 승격되고 얼마 후 왕후로 복위되었으나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다. 이듬해 아관파천을 거쳐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명성황후로 추존된 후 국장이 거행됐다. 이때 그려진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일제가 강탈해 가서 궁내청에서 감금되었다가 2011년에 환수됐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미국과의 가츠라-테프트 밀약 이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했고 통감부가 보호정치를 실시했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퇴위당했고, 마지막 조치인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행정권을 빼앗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1910년 경찰마저 해산되었고 급기야 경술국치의 날이 오고 말았다.
일제는 스스로 망한 조선을 집어삼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치밀한 각본에 의해 방해가 되는 청나라·명성황후·러시아를 하나하나 제거한 이후 미국과는 한국과 필리핀을 서로 나눠 갖자는 밀약을 체결함으로써 그야말로 무풍지대가 되어 이 땅이 식민지가 된 것이다.
치욕이었지만 을미년의 참변을 상기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언제든지 명성황후처럼 외적에게 처참하게 수모를 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향후 국론통일과 국력배양에 힘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일본은 과거 만행에 대해 반성은커녕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다시 올리는 중이다. 127년 전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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