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가 과연 신사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은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한국인과 분명 다른 행동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려에는 항상 인내가 동반되기 마련이고 이는 실상 실천하기 힘든 성품이기에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 같다. 먼저 전형적인 한국적 관습에 익숙해 있던 한국인이 경험한 영국인의 신사적인 행동사례를 들어본다.
우리 부부가 ‘다이소’를 함께 갔을 때 이야기다. 손님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2층으로 가는 층계를 올라갔다. 그때 아장아장 걸어 내려오는 어린 아기를 가운데 두고 젊은 부부가 아기 앞·뒤에서 층계를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이 모두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갑자기 안토니가 가던 걸음을 멈춰섰다. 그는 이미 올라왔던 계단을 바쁘게 내려가 한쪽으로 물러서더니 어린 아기와 젊은 부부 일행이 아래층에 닿을 때까지 함박웃음을 머금고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범죄자를 추적하던 경찰이 유모차를 밀고 가는 어머니가 안전하게 지나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려주는 장면을 느린 촬영기법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긴 시간이었다. 어린 아기를 기다려주는 영국인을 기다리느라 조급한 한국인의 참을성이 시험대에 올라야 했던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영국 신사들은 선천적으로 마음이 느긋한 걸까? 아니면 그들은 타인과 주위를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인가? 이날 안토니의 신사적인 인내심을 지켜보면서 선망 섞인 의문이 들었다. 이후 일상에서 경험하는 영국인의 타인에 대한 배려는 신사라는 평가를 넘어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가령 한국 가정 식탁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기꺼이 하던 식사를 멈추고 가져다주는 것이 예사이다. 이는 전통 가부장제의 사회적 관습이라 남편은 감사할 일이라기보다 당연지사로 여기고 아내는 의무라 여기고 사랑으로 베푼다. 반면 영국인은 식사 중 누군가 필요한 것을 가지러 식탁을 떠났다가 식탁에 되돌아올 때까지 식사를 멈추고 기다려 준다. 심부름을 간 사이에 혼자 식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인 편에서는 되려, “식사 중 자리를 뜨는 것 자체가 실례를 범하는 것일까”라고 물어보게 된 순간이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 개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들 말한다. 한국의 도로에서 신호등이 멈춤에서 주행으로 바뀌면 신호등 앞에 선 차는 그야말로 ’즉각’ 출발해야 한다. 일 초 안에 출발하지 않으면 뒤에 서 있는 운전자들의 경적 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안토니는 언제나 앞차가 출발할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준다. 간혹 인내의 한계에 이를 정도로 앞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경적을 울리는 대신 운전대를 잡은 채, “잠 깨라 (Wake up!)” 하고 혼잣말로 외치는 게 전부다. 영국의 시골이나 외딴 섬에는 외길(single-track)을 운전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앞에서 마주 오는 자동차가 보이면 멈춰 서 상대방 차가 지나가도록 기다리기를 반복해야 한다. 이 경우 영국인은 가능하다면 먼저 가는 편 보다는 먼저 멈추기를 선택한다.. 한국인이 볼 때 상대방 차에게 과도한 양보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평이 생길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면 정말 영국인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사이며 인생의 달관자들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많은 영국인은 교통사고가 났거나 도로공사가 있어 운전 중 정차해야 한다면 10분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차를 돌려 30분이 걸려도 돌아서 가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농업용 트랙터 등 속도가 느린 차량이 앞에 가는 경우 순식간에 교통체증으로 이어지는 자동차의 긴 행렬에 섞이게 된다면 이를 잘 참아 낼 운전자는 영국이라고 해서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교통표지판을 보면 이런 경우 좌절감(frustration)을 유발하는 모양이니 말이다.
영국의 교통표지와 전광판
‘Frustration causes accidents, use lay-by to allow traffic to pass.(좌절감은 사고를 유발합니다. 레이바이(도로변에 만들어놓은 일시 정차 구역)를 이용하셔서 다른 차들이 지나가도록 해주십시오)’
: 스코틀랜드 도로에서는 종종 집채같은 트랙터 뒤를 오랫동안 따라가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느린 앞차 때문에 속터지는 운전자들의 심리적 고통과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교통 전광판이 느림보 차량을 향해 권고하는 영어 표현이다.
‘Please drive safely.(안전운전 하세요)’
: 스코틀랜드의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으레 보이는 교통표지이다. 마을을 벗어날 때는 ‘Thank you for driving safely(안전운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교통표지가 나타난다.
‘Keep two chevrons apart.(갈매기표시 무늬 두 개의 간격을 유지하십시오)’
: 영국의 고속도로를 가다 보면 도로에 일정 간격으로 갈매기표시가 되어있는 곳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때 앞차와 일정 간격을 유지하라고 전광판이 안내하는 문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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