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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명성황후를 그리워한 대한제국의 광무황제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11-22 09:39:12
 
▲ 성헌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려역사저널 편집인
1895년 을미년에 명성황후는 너무도 처참하게 일본인들에게 죽어갔다. 이틀 후 고종은 일본과 친일파들의 강압에 굴복했는지 비명에 죽어간 왕후를 폐서인시킨다는 조서를 내렸다가, 다음날 바로 빈으로 승격시키고, 두 달 후 왕후로 다시 복위시켰다.
  
8월 22일(음) 교지에 “왕후 민씨가 자기와 가까운 무리를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해 짐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졌다. (생략) 민씨는 패거리들을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대신을 만나는 것까지 방해했으며, 또한 나라의 군대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해 변란을 일으켰다. (생략) 이것은 왕후의 직위와 덕에 타당치 않고 그 죄악이 가득 차 선왕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기에 짐이 어쩔 수 없이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라고 했다.
 
위 교지에 반발한 대신들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 교지가 고종의 진심이 아니었음은 2년 후 왕후를 황후로 책봉하면서 지은 어제행록에 고종의 애틋한 마음이 묘사되어 있어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고종은 왕후의 장례를 치르라는 교지를 내리지 않았다. 물론 시신이 완전 소실된 상태였지만 말이다.
 
 
▲ 현재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던 원구단의 모습 [필자제공]
 
1896년 2월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고는 김홍집 등 친일파 역적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약 1년간 지내다가 1897년 환궁해서는 스스로 대한제국(大韓帝國)임을 선포했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래 중국의 속국이었으나 500여 년만인 1897년 10월12일(양력)에 자주국가임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고종은 원구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 지내고는 대한(大韓)을 국호로 광무(光武)를 년호로 하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면서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비록 스러져가는 힘없는 나라였지만 스스로 황제국임을 선포했다는 것은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자는 뜻깊은 의미가 있다.
 
“올해 9월 17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열두 무늬 곤룡포와 면류관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위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 민씨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 대한제국의 황제즉위식을 마치고 대안문으로 환궁하는 광무황제. [필자제공]
 
왕후에게는 명성황후라는 시호가 올려졌는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명(明)’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 ‘성(成)’이라고 하였다. 올리는 시호는 ‘명성(明成)’이라 하였고, 능호(陵號)는 ‘홍릉(洪陵)’이라고 하였으며, 전호(殿號)는 ‘경효(景孝)’라고 하였다.
 
1897년 내려진 황후 책봉조서에는 “짐이 임금 자리에 오른 지 32년이 되는 을미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궁내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워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상복을 벗은 지금, 나의 슬픔과 동궁의 애통함은 끝이 없다. 생각건대 오늘날 큰 왕업을 중흥하여 자주 국권을 찾은 것은 실로 황비가 도와준 성과이다.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올림은 예의와 정리에 부합되므로 큰 은택을 널리 베푸노라.”
 
광무황제는 명성황후를 그리워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직접 써서 남겼다. 
 
“아! 짐이 황후를 저버렸다. 황후는 짐에게 간절한 일념으로 받들었으나 짐은 황후의 몸을 궁금(宮禁)에서 잘 보존하지 못하였다. 아! 내가 황후를 저버린 것이다. 지금 슬퍼하고 추모한들 후회와 여한을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황후는 경복궁의 곤녕합에서 8월20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45세이다. 이날 새벽에 흉악한 역적들이 대궐에 난입해 소란을 피우니 황후가 짐에게 ‘원컨대 종묘사직의 중대함을 잊지 말 것입니다’라고 권했다. 위급한 중에도 종묘사직을 돌보는 마음이 이와 같았는데 조금 후에 황후를 다시 볼 수 없었으니 오직 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 드디어 천고에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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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개념도. [뉴시스]
 
광무황제는 사랑했던 왕후에게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올리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 글에는 마치 농촌에 사는 어떤 촌부가 일찍 죽어간 30년 생사고락을 함께 한 아내를 애절하게 그리워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문구로 그득하다.
 
“황후가 훌륭한 공덕으로 짐의 곁에서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짐은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나 황후는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아! 황후가 대궐에 있으면서 정사를 도와준 것이 30년인데 실로 순리에 처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길을 밟지 못한 관계로 도리어 간고하고 험난한 일만 하더니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중년 나이에 죽었다. 이것이 어찌 하늘 탓이겠는가?
 
“아! 황후가 오래 살았더라면 숨은 공로와 부드러운 덕화가 나라를 빛나게 하여 책에 기록할 것이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짐이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는 것이고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도다. 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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