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 전략(Gray Zone Strategy)이 학술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회색지대 전략에 관한 학술적 정의는 연구자에 따라 다양하며, 특히 범위와 유형 등에 관해 명확한 학술적 경계가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회색지대 전략을 규정짓는 공통적인 특성과 본질은 분명히 존재한다.
회색지대 전략은 “그 전략을 구사하는 국가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안보 목표를 성취하려는 대부분의 전략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 전략 행위가 사용되는 다툼은 회색지대 분쟁(Gray Zone Conflict)으로 규정할 수 있다. 회색지대 전략의 본질은 전략 사용국이 정규군대를 동원하지 않고 전면 전쟁에 이르지 않으면서 안보 이익을 달성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도의 모호성과 전략적 점진주의를 추구하는 회색지대 전략은 대체로 국제정치에서 기존 질서에 대한 현상 변경을 추구하는 국가에 의해 필요에 따라 제한적으로 사용됐다.
그러므로 회색지대 분쟁은 직접적인 무력 충돌을 회피하면서 다양한 국가역량을 활용해 장기간에 걸쳐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압하는 통합적 전역수행을 의미한다. 회색지대 분쟁은 국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목표(Objectives)를 설정한다. 회색지대 분쟁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법(ways)을 강조하나 전(全)정부적 접근이 필요하며, 국가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합적인 강압수단(means)으로 전역을 수행하게 된다. 사용되는 분쟁 수단은 통상 비군사적이고 비파괴적인 비대칭 수단이나 레드라인 이하에서 활용된다.
회색지대 분쟁은 전쟁을 회피하려는 국가들 사이에서 발생하기 쉬운 분쟁 형태이다. 회색지대 분쟁은 일종의 정치전(Political Warfare)으로 공개와 비공개 작전이 포함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전쟁에 이르지 않고 국가의 의지를 달성하는 강압전략이며 부전승전략이다. 회색지대 분쟁은 전통적인 전쟁(war)이나 전(warfare)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수단의 비대칭성으로 상대방에게 딜레마를 강요한다. 회색지대 분쟁 수행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포함해 다양한 수단이 사용되지만, 기본적으로 폭력과 위법을 배제하려는 성향이 있다.
최근 들어 중국과 러시아가 자신들의 ‘핵심이익(core interest)’이 걸렸다고 주장하는 지역에서 벌이는 다양한 비(非)전통적인 강압전략이 주목받고 있다. 이른바 회색지대 강압전략이라 불리는 이 외교안보 행태는 기존의 전통적인 안보 관련 이론들로 쉽게 파악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배후의 동기와 잠재적 결과를 자세히 전망해 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회색지대 강압전략은 말 그대로 전통적인 육·해·공군의 정규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는 비대칭적·비물리적(non-kinetic) 활동으로 대상국이 정규군을 동원한 대응을 어렵게 하며, 이 활동을 빌미로 확전도 어려운 수준의 전술 활동을 말한다. 회색지대 강압전략의 가장 큰 목적은 강압실행 국가가 상대방과 이해충돌을 해결할 때 살라미 혹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현상유지를 변경한 후 변경된 상황을 기정사실로 해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있다.
‘게라시모프 독트린’으로 명명된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전략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러시아와 접경한 중·동부 유럽국가들을 대상으로 사용됐다. 이를 통해 러시아는 직접적인 군사력 사용을 회피하면서 상대방의 취약성을 공략해 유럽지역에서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을 증진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전략은 장기간 일관된 방식으로 적용됐으며,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각종 전략수단이 복잡하게 조합돼 활용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은 비물리영역을 활용한 전쟁수행 방식인 ‘삼전(三戰)’이 대표적이다. ‘삼전’은 심리전·여론전·법률전을 포함한 비물리 영역을 이용한 전쟁방식으로 정보작전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중국은 전쟁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전통적인 전쟁과 분쟁의 제약요소를 완화시키고, 시·공간과 수단의 한계를 넘어서 무제한으로 경쟁하는 새로운 전쟁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반도 주변에서 회색지대 전략은 중국, 러시아, 북한이 사용할 수 있다. 각 국가는 다른 전략목표를 가지고, 다양한 회색지대 전략수단을 활용할 것이다. 국제질서 변화의 중심에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할 때, 한반도 주변의 회색지대 위협은 더욱 복합적인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위협과 양상을 연속성을 가지고 관리해야 한다. 수집된 정보를 축적해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주기적인 평가로 회색지대의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회색지대 전략은 결심의 딜레마를 이용해 국가의 분열과 약화를 시도한다. 국력의 요소를 운용하는 각 정부 부처와 사회적 노력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회색지대 위협을 관리·대응하는 전담 조직을 설립하고, 범정부적·범사회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적시적인 결심과 효과적인 대응을 방해하는 제반 법규와 제도를 보완하는 노력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회색지대 강압전략은 세계화된 국제 체제하에서 상대방 군사력을 자극하지 않고 조금씩 자국의 국가이익을 구현해 차후에 현상유지 변경이라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에 좀 더 유리하기 때문에 유용성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러시아와 중국의 빈번한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침범과 서해에서 중국의 해경과 해양조사 활동의 증가를 경험하고 있으며, 일본의 독도 순시선 출현 역시 빈도가 급증하고 있다. 핵﹘미사일 능력의 고도화로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의 사이버전 위협의 급증 역시 북한의 대표적인 회색지대 강압 전략이다.
따라서 회색지대 분쟁 발생 시 외교·정보·군사·경제(DIME)라는 전통적인 대응수단 뿐만 아니라 법규·시민사회·학계 등 다양한 분야의 노력이 함께 통합돼야 한다. 국력 요소들은 전략 상황과 위협의 강도에 따라 실제 사용 가능한 방안들이 구체화 될수록 효과적이다. 국력 요소별 핵심능력과 취약점을 도출하고, 각종 완화 조치를 발전시켜야 한다. 취약성 분석 시 국가 수준의 전략·감시·정찰(ISR) 자산 부족이나 핵심 시설의 방호를 위한 미사일 방어자산 부족과 같은 물리적 요소와 전자기·사이버·우주 등 비물리적 요소도 함께 검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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