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케임브리지 주에 있는 위틀씨라는 마을은 매우 특별한 지리적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지역은 원래 끝없이 평평한 늪지대였다고 한다. 그러던 19세기 후반, 수없이 많은 도랑을 파기 시작했고 늪을 이루었던 물이 근처 강으로 배수된 덕분에 오늘날의 위틀씨가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위틀씨는 또한 영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연중행사를 여는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매년 1월 창고에 묵고 있던 쟁기를 꺼내 땅을 갈아엎는 농경 절기가 돌아오면 악귀를 몰아내고자 ‘밀짚 곰 축제(Straw Bear Festival)’를 벌이는 것이다.
영국인들의 관습과 예의범절과 취향이 거북하기만 했던 필자의 초창기 영국 체류 시절, 처음 영국인의 정서로 초대해 준 은인이 바로 ‘테디 베어’들이다. 이를 알아챈 안토니가 하루는 ‘밀짚 곰’을 보러 가겠느냐고 물어왔다. 세상에 밀짚으로 만든 곰이 있다고? 자세한 설명하기를 거부하는 안토니를 따라 기대보다는 의구심을 품고 밀짚 곰 축제를 향해 1월의 추운 새벽 살얼음을 헤치며 길을 나섰다.
외곽을 흐르는 강을 지나 마을 중심으로 향하자니 교회 입구와 레스토랑과 펍들은 안내문을 내걸고 축제 손님들에게 쉼터와 음식과 맥주를 대접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국 관광 시 가장 불편할 수 있는 사항 중 하나가 ‘화장실 발견’하는 일인데, 마을 광장에는 임시 화장실을 줄줄이 마련해놓고 있어 안도의 숨을 쉬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축제에서 ‘맥주(Beer)’는 수많은 댄스 공연그룹과 손님들에게 온종일 목을 축여 줄 주메뉴이니 임시 화장실 설치는 필연의 배려이기도 했다.
마을 골목골목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울긋불긋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온갖 악기와 소도구를 들고 나타나 어디론가 분주하게 사라졌다. 옆에서 졸랑졸랑 따라가는 개도 주인과 똑같은 분장을 한 것을 보면 동일한 드레스 코드로 그룹을 표시하는 것이 중요한 듯하다. 알록달록한 깃털로 감싼 사람들, 온통 초록색 잎으로 장식한 사람들, 흰색 단복에 금색 방울들을 달고 양 손에 막대기를 들고 가는 사람들; 검은 옷에 단검을 든 사람들; 장검을 든 사람들; 흑백 무늬의 패턴으로 장식한 사람들; 화려한 롱스커트에 나막신 소리를 내는 묵직한 구두를 신은 여인들; 말이나 닭으로 분장하거나 장대에 달린 빗자루를 들고 바보짓을 하는 ‘마을 백치(The Village Idiot)’들, 이 모두가 축제에 참여한 공연그룹들이라고 한다.
구경꾼이 양쪽에 빽빽이 들어찬 가운데 축제행렬의 입장이 시작되었고 스물에 가까운 그룹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독특한 연주에 춤을 추며 지나갔다. 하지만 ‘밀짚 곰’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 보니, 짚으로 싸인 장대한 물체와 옆에 꼬마 크기의 물체가 연주자들에 둘러싸여 안내인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등장하고 있었다. 바로 축제의 주인공 밀짚 곰들인 것이었다. 그들은 점잔을 빼며 의젓하게 걸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술에 거나하게 취한 듯 뒤뚱뒤뚱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관중을 끌어당기기 위한 최면술이었던지 모두들 침을 삼킨 채 밀짚 곰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축제행렬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는 둘러선 관객들과 공연단들의 열띤 공연이 진행되었고 펍들은 만원이라 맥주잔을 든 사람들이 가게 밖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한편 이미 한바탕 공연을 마친 후 맥주로 갈증도 해갈하고 다시 공연장소로 향하는지 펍을 나서는 수십 명의 ‘레드 래스터(Red Leicester-얼굴을 붉은색으로 칠함)’들과 맞부딪쳤다. 관객들의 사진 세례를 받으며 하나둘 지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 레드 레스터가 다가와 내 뺨에 살짝 키스를 던지고 갔다. 옆에 있던 안토니에겐 쉽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을까? 공교롭게도 영국인들이 애호하는 치즈에는 ‘레드 래스터’라는 이름의 오렌지색 치즈가 있다. 이후 장을 보러 가 레드 래스터 치즈가 눈에 띌 때면 안토니는 영락없이 볼 키스 사건을 되새기며 농담을 던지곤 한다.
“Would you like to go and see the Straw Bears?”
밀짚 곰들을 가서 구경해 보시겠어요?
“May I have a 2023 Festival program please?”
2023년 축제 순서 책자 하나 주시겠습니까?
“The Straw Bears were tottering about as if they have drunk too much beer.”
밀짚 곰들은 마치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 취한 것처럼 뒤뚱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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