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각 전통문화 가운데 오늘의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치면서 현대적 창작에 영감을 주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조각보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20세기 추상화에 필적할 수준의 감각과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우리 여성들에게는 안료보다 섬유 계통의 직물류나 지물류가 표현 수단으로 더 친근한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여성작가들은 천을 안료 대신 사용하여 기발하고 완성도 높은 좋은 작품들을 많이 생산해 내고 있다.
특히 섬유미술이라는 장르에서 섬유의 다양한 물성에 기초한 창작 훈련이 많이 이루어지는 등 섬유의 조형적 응용이 상당히 활발하며 자주 목격되고 있다. 굳이 섬유미술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워낙 섬유라는 매체가 여성친화적인 것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 전유의 장르처럼 비치기도 한다.
섬유미술 전공자가 아님에도 섬유를 활용하여 완성도 높은 조형의 경지를 보이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 김명숙 작가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페인팅을 전공한 이래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 온 김 작가가 섬유 재료를 매체로 쓰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가량 된 것 같다. 오일페인팅에서 섬유페인팅으로 전환한 지 이십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게 느껴지지만, 시작이 50대 때부터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보통 다른 작가들 같으면 양식적인 면에서 정착의 길에 들어서는 단계다. 그러한 절정기에 그동안 일궈 온 자기만의 영지를 떠나 낯선 다른 세계에서 새롭게 실험하고 개척하며 첫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작가의 천 오브제는 ‘입는 용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길쌈이나 바느질이라는 수고는 이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거룩한 대상과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함을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영혼의 정원’ 연작은 작가의 신앙고백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태복음 8:25·28)
보통 섬유 소재를 회화적으로 응용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레디메이드 오브제의 미학 위에서 성립되고 있다. 원단에 있는 기존의 패턴 등을 차입하는 방식은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 혹은 포스트모던의 무작위적 조합인 브리콜라지(bricolage)라는 양식에서 이미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 그러한 조합을 절제하며 최소화시키고 있다. 작가의 독창적인 면 자체만으로도 표현 혹은 서사의 완성도가 확실해서 자칫 필요 이상의 조합은 사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조는 단조롭고 잔잔하지만 텍스처(texture·재료 표면의 미세한 질감이 주는 느낌)에서 다양하고도 미묘한 반응들을 야기한다. 가느다란 선들의 집적은 아무리 보아도 권태가 있을 수 없는 따스하고도 신비스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미술이 방법적으로 다양하면서도 깊이 있는 예술성을 구현할 수 있는 비결 역시 바로 그러한 전통문화에 있다. 찬란한 전통문화의 기반 위에 유전적으로 받은 솜씨와 감각이 오늘의 문화 환경과 조화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우리 미술은 화려한 비상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
미래지향적인 첨단기술을 비롯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생활 속 갖가지 사물이나 요소들을 감각 있게 조형 영역으로 도입하고 응용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미술의 건강함과 경쟁력을 위해 지극히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3년간 준비한 대작들이 즐비하다. 작가의 춘천 작업실에 쌓아 둔 그 작품들이 빛을 못 보고 사장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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