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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放談)
마름질과 바느질로 구현한 ‘영혼의 정원’
직물에게 옷에서 벗어날 자유를 준 독창적 섬유회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정결의식처럼 찾은 조형 어법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중단된 유럽 투어 재개 위한 날갯짓
이재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5-12 10:25:38
▲ 이재언 미술평론가
우리의 시각 전통문화 가운데 오늘의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치면서 현대적 창작에 영감을 주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조각보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20세기 추상화에 필적할 수준의 감각과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우리 여성들에게는 안료보다  섬유 계통의 직물류나 지물류가 표현 수단으로 더 친근한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여성작가들은 천을 안료 대신 사용하여 기발하고 완성도 높은 좋은 작품들을 많이 생산해 내고 있다.
 
특히 섬유미술이라는 장르에서 섬유의 다양한 물성에 기초한 창작 훈련이 많이 이루어지는 등 섬유의 조형적 응용이 상당히 활발하며 자주 목격되고 있다. 굳이 섬유미술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워낙 섬유라는 매체가 여성친화적인 것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 전유의 장르처럼 비치기도 한다.
 
섬유미술 전공자가 아님에도 섬유를 활용하여 완성도 높은 조형의 경지를 보이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 김명숙 작가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페인팅을 전공한 이래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 온 김 작가가 섬유 재료를 매체로 쓰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가량 된 것 같다. 오일페인팅에서 섬유페인팅으로 전환한 지 이십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게 느껴지지만, 시작이 50대 때부터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보통 다른 작가들 같으면 양식적인 면에서 정착의 길에 들어서는 단계다. 그러한 절정기에 그동안 일궈 온 자기만의 영지를 떠나 낯선 다른 세계에서 새롭게 실험하고 개척하며 첫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 Soul Garden, 262cm × 188cm, Fabric Mixed Media, 2014년~2022년.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계기가 있었기에 낯선 조형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일까. 필자의 기억으로는 지천명 언저리에 암 수술을 받았으며, 그때부터 심경에 변화가 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처하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취사의 굴곡을 겪었을까. 그런 경우 특히 생명·영혼·빛·존재 등의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개념들을 되새김질하듯 자주 운위하게 된다. 작가의 시그니처 양식은 그렇게 시작됐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의 미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신체와의 직접적 접촉을 더욱 중시하게 된다. 그러한 신체와 행위의 직접성, 있는 그대로의 물성, 말씀으로부터의 영감 등이 작가의 작업에 중요한 모토로 자리하게 된다.
 
작가의 천 오브제는 ‘입는 용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길쌈이나 바느질이라는 수고는 이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거룩한 대상과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함을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영혼의 정원’ 연작은 작가의 신앙고백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태복음 8: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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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ul Garden, 70cm × 70cm, Fabric Mixed Media, 2018년.
 
작가의 화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구성적 특징은 천의 절단면이 집적을 이루어 변화무쌍한 면으로 승화된다는 점이다. (작가의 이러한 독창적 방법을 일컫는 적절한 기법 명명이 절실하다.) 그 면의 마티에르는 안료로는 구현할 수 없는 포근하고도 메타포가 풍부한 물성의 화면을 이룬다. 그렇게 단면의 선들로 촘촘하게 집적된 면구성은 작가가 구구하게 다른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화면의 물성과 감촉만으로도 필요한 서사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마티에르와 리듬·패턴·구성들을 다양한 구색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켜켜이 쌓인 단면선들이 구현한 면이라는 요소에서 경험은 결정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이 작업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과도 같이 내공과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마름질에는 경건한 제사를 위한 정결의식 같은 비장함까지 담겨 있다. 
 
▲ Soul Garden, 100cm × 100cm, Fabric Mixed Media, 2021년.
 
보통 섬유 소재를 회화적으로 응용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레디메이드 오브제의 미학 위에서 성립되고 있다. 원단에 있는 기존의 패턴 등을 차입하는 방식은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 혹은 포스트모던의 무작위적 조합인 브리콜라지(bricolage)라는 양식에서 이미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 그러한 조합을 절제하며 최소화시키고 있다. 작가의 독창적인 면 자체만으로도 표현 혹은 서사의 완성도가 확실해서 자칫 필요 이상의 조합은 사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조는 단조롭고 잔잔하지만 텍스처(texture·재료 표면의 미세한 질감이 주는 느낌)에서 다양하고도 미묘한 반응들을 야기한다. 가느다란 선들의 집적은 아무리 보아도 권태가 있을 수 없는 따스하고도 신비스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Soul Garden, 120cm × 90cm, Fabric Mixed Media, 2018년.
 
이러한 작가의 독창적인 양식이 아직 우리 미술시장에서는 프로모션 면에서 다소 미진한 단계다. 하지만 일정한 상황이 충족된다면 국외 무대에서도 만족할 만한 결실을 얻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실제로 작가는 2019년에 프랑스(Ailes Concept Gallery)와 러시아(Primorye 주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진 바 있다. 타피스트리 전통이 강한 유럽답게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여러 점의 판매 실적이 있었고 향후 전시에 대한 성과도 예상되고 있었다. 이 성과들을 토대로 여러 가지 후속 프로젝트 제안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의의 코로나19 대유행을 맞았고, 3년의 공백기 끝에 이제 모든 네트웍을 다시 가동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제 그러한 제안들을 위해 움직이려 하지만 작가 혼자서 움직이는 건 쉽지 않다. 운송 및 체류 등과 관련해 협찬이나 후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Soul Garden, 182cm × 228cm, Fabric Mixed Media, 2020년.
 
▲ Soul Garden, 58cm × 45.5cm, Fabric Mixed Media, 2017년.
 
작가의 화면이 서구에서 더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요소는 다분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원천은 바로 작가가 DNA로 물려받은 규방문화의 전통이다. 바느질과 마름질을 생활 속에서 수행해 왔던 바를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우리 전통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독자적으로 재창조해 일구어 냈다.  
 
▲ 김명숙 작가.
우리 미술이 방법적으로 다양하면서도 깊이 있는 예술성을 구현할 수 있는 비결 역시 바로 그러한 전통문화에 있다. 찬란한 전통문화의 기반 위에 유전적으로 받은 솜씨와 감각이 오늘의 문화 환경과 조화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우리 미술은 화려한 비상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
 
미래지향적인 첨단기술을 비롯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생활 속 갖가지 사물이나 요소들을 감각 있게 조형 영역으로 도입하고 응용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미술의 건강함과 경쟁력을 위해 지극히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3년간 준비한 대작들이 즐비하다. 작가의 춘천 작업실에 쌓아 둔 그 작품들이 빛을 못 보고 사장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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