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으로 물건 하나 주문하면 상품이 새벽에 거짓말처럼 현관문 앞에 도착해 있다.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기에 별 느낌이 없지만 외국인들은 경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빠르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 가공할 에너지와 속도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스스로 평균 이상으로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새벽 동대문시장을 둘러보라 권하고 싶다. 그곳의 치열하고 억척스러운 에너지야말로 인구에 회자될 일이다. 한국인의 근면성과 에너지는 도시·농촌 할 것 없이 이 땅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이렇듯 뜨거운 열기를 분출하는 우리의 역동적인 삶의 풍경은 심미적으로도 판타지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호재를 우리 작가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우리 삶의 공간을 수놓는 밤의 에너지는 작가들에게 매혹적인 영감의 원천이다.
밤을 밝혀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감각적인 필치로 그려 내는 화가로는 단연 김성호(61)를 꼽을 수 있다. 그는 한밤의 음유시인이라 불릴 만한 불세출의 야경화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후반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새벽 야경을 줄기차게 그려 왔다. 초기의 그림들은 인공조명에 의한 극적인 표현을 즐겨 구사했던 17세기 바로크 화풍을 연상시키는 것들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작가의 초기 작품 가운데 검정 바탕의 커다란 캔버스 한쪽에 희미한 차내등 빛이 새 나오는 모습의 ‘새벽’(2004)에서 당시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대범하고도 감각적인 화면이라는 점에서는 에드워드 호퍼에서 진일보한 신사실주의적 단색화의 일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칠흑 같은 주변을 버스 안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밝혀 주고 있는 장면, 영화의 인트로 혹은 피날레 같은 이 장면이야말로 얼마나 강렬하고 함축적인가. 희미한 역광만이 존재를 암시할 뿐, 모든 세계를 어둠에 가둬 두는 독특한 앵글로 관객들에게 적절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2002년 작가는 대구 시대를 마감하고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긴다. 이때부터 그의 화면은 도시의 역동적인 활력의 상징인 불빛들을 화면에 대거 도입하기 시작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부감법 앵글의 야경은 그야말로 눈부신 보석을 뿌려놓은 것 같은 판타지 그 자체다. 물론 도시의 불빛만이 아니다. 도시의 골목길 풍경들이나 포구의 어선들이 켜둔 불빛으로 대낮처럼 밝은 풍경들도 꽤 많다. 도시든 항구든 우리 이웃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일찍부터 일과를 시작하고 있는지를 느끼기에 충분한 무인 풍경화들이다.
그는 그림 그리기의 취미와 특기를 가진 많은 일요화가들이나 애호가들을 팬돔으로 가지고 있는 화가다. 지인들 가운데 나름대로 묘사력 수련이 잘돼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그런데 김성호의 야경은 흉내조차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분방해 보이는 필치들로 가득한 화면, 그러나 모든 필치들이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안착해 있는 감각적인 퍼포먼스에 매료되곤 하는 것이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구현되는 밤의 판타지와 아우라는 일요화가들 눈에 마술처럼 보인다고들 말한다. 가까이서 볼 때는 두터운 마티에르의 추상화 같은데 한 발 뒤로 물러서 보면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절제된 짜임새 속에서도 오묘한 조화와 재현의 완성도를 보이는가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에 빨려 든다.
작가가 서울로 상경하여 많이 그렸던 그림들 가운데 우중 야경도 빼놓을 수 없다. 빗속을 달리는 버스나 승용차들, 빗물이 고인 바닥에서 불빛이 난반사되는 장면들은 대부분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던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이른바 그림이 되게 하는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우중 야경이라는 것이 사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화면에서는 워낙 감각적으로 움직이는 개성적 필치들에 의해 전혀 다른 류의 일루젼들이 창출된다. 선명한 원색의 차량 이미지들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인 필치들과 어울려 도시의 활력적 인상과 감흥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근작으로 올수록 초기의 절제된 화면 질서보다는 잘 직조된 천에서 씨와 날을 풀어내듯 이완돼 보이는 율동적이고 나이브한 필치의 재현이 두드러진다. 작가가 2015년 제작한 대작 ‘새벽-서울’의 경우는 눈 내린 서울 풍경인 듯, 거의 그레이 톤의 그림인데 형태 인지가 모호하기 그지없는 그림이다. 그린 듯, 만 듯한 화면이지만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 이쯤 되면 추상이나 단색화 양식이라 해도 무방한 초월적 양식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몽환적인 인디고 블루의 야경은 마치 수묵의 갈필(渴筆) 같은 거친 붓의 터치들을 주조로 하고 있다. 감각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도 절제 속에서 재현해 내는 도시의 이미지는 여느 화가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겹의 중색을 통해 어두운 면의 틈새로 스며나오는 밝은 빛들의 대비가 우리 도시의 활력과 심미성을 더욱 낭만적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야경에는 사람의 모습이 없다. 거리두기에 의한 원격 관조, 혹은 차량이나 건물 벽 등으로 가려지고 있다고 생각하자. 물론 그의 모든 작품들이 열심히 일하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냥 새벽의 도시를 먼 거리에서 심미적으로 바라보면서 영감의 사역에 따라 추상과 재현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감정도 이입시켜 가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이야기를 특정 방향으로 몰고 가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새벽이라는 시점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도시가 기지개를 켜는 시간을 보다 각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은유와 절제·중립적 스탠스를 취하는 가운데 해석의 주권을 독자 혹은 관람자에게 넘기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를 추출해 내는 일은 관람자의 몫임을 소리없이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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