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간 백성은 적어도 1592년 임진왜란까지는 중국을 선진국, 조선은 중진국, 일본은 후진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후진국 일본은 오랜 세월 중진국 조선에게 특히 학문적인 부문에서 한 수를 배우며 머리를 숙여 온 국가였다. 이런 일본이 어떻게 선진국 중국보다 빠르게 성큼성큼 근대화로 내달으며 앞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위기 의식의 차이’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일본의 힘을 대외에 과시하는 큰 계기를 만들었다. 중국(명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후진국 일본이 존재감을 크게 알리며 겁을 준 전쟁이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정권에서 약 260년간의 평화는 중국에게 위협적이지 않아 곧 잊혀진 나라처럼 되었다.
봉건시대의 평화가 너무 길었던 일본에게 위기와 근대화의 씨앗이 함께 찾아왔다. 1853년 선진국 미국의 페리가 강력한 무기를 앞세우며 내민 강제 개항 요구였다. 일본은 기억의 저편에서는 10여 년 전 또다른 선진국인 영국이 중국(홍콩)을 위협하여 제압한 ‘아편전쟁’을 떠올렸다. 올 것이 왔다는 체념도 있었다.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에 상주해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장으로부터 ‘아편전쟁’의 정보를 상세히 보고받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641~1859년 사이 데지마에 주인을 포루투갈에서 네덜란드로 교체하여 서양과의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부여하고 있었다. 아편전쟁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서양과의 힘의 격차를 제대로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 ‘위기 의식’은 근대화로 가는 씨앗이 되어 겨울의 언 땅에서 싹이 뚫고 나와 파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위기 의식 결여’라는 허접함의 극치를 보여 주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더 크게 놀랐다. 늘 상전으로 모셨고 세계 제일이라고 믿었던 큰 형님 중국이 유럽의 조그만 나라 영국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 중국에선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1644년부터 1912년까지 300여 년 동안 대륙을 통치했다. 1839년 1차 아편전쟁 전에 벌써 영국에선 1차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중화주의의 중국은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이를 무시했다. 당시 중국의 거만은 하늘을 찔렀고 서양 전체에 대해 ‘위기 의식’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무역을 위해 몇 번이나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큰 문제가 된 것은 중화주의 방식을 고집하는 예법이었다. 영국 사절단에 청나라 황제를 만나기 전에 전통적인 방식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영국은 자국 왕실의 위엄이 손상을 받는 행위라며 거부했다. 삼배구고두례란 한 번 절하고 세 번은 머리를 땅에 찧으며 하는 절을 말한다. 이는 명나라 때 만들어진 중국식 조공 체제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영국 사절단에게 건륭제는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하여 국경 안에 부족한 것이 없으므로 국경 바깥 오랑캐로부터 물자를 수입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중국은 기원 후 1800년 동안 명나라 때는 세계 경제력의 4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세계 1위의 국가였다. 이런 자부심과 오만 때문에 영국의 산업혁명과 신무기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결국 영국은 아편 단속과 무역 적자에 대한 분풀이로 오만한 중국을 손보기 시작했다. 그 누가 청나라 황궁에서의 전통인 삼배구고두례를 영국 사절단에 강요한 무례(?)가 전쟁으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을까. 결국 ‘위기 의식’을 갖지 못한 중국(청)은 전쟁에서 패했고,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홍콩을 영국에 양도해야만 했다. 내치는 더 힘들어져 근대화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한편 후진국이었던 일본은 사무라이가 어둠 속에서도 칼을 날렵하게 뽑듯이 국가의 미래 방향 설정과 실천이 재빨랐다. 미국의 페리로 인하여 개방과 근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임을 개혁적 다이묘들이 알아챘고, ‘존황양이(尊皇攘夷)’라는 명분은 막부를 몰아내는 강력한 결집력이 되어 마침내 성공했다.
메이지 시대(1868~1912)에 들어오자 칼을 차던 유능한 사무라이들이 유학 길에 나서며, 경제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서양 배우기에 칼을 빼들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메이지 시대의 주축이 사무라이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아시아에서 첫 근대화의 성공을 이룬 것은 일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위기 의식의 차이’가 후진국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든 것을 보았다. 1800년 동안 세계 1위였던 중국도 한번 망하자 다시 일어나는 데만 200년 넘게 걸렸다. 이는 중국의 ‘위기 의식의 결여’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였다.
역사가들이 남긴 명언이 있다. ‘중화 세계가 진지하게 외부 문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불교와 마르크스주의뿐이다.’ 중국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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