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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명소산책] 루소의 영원한 적 볼테르와 팡테옹
두 적수가 죽어서 함께 마주 보고 있는 곳
파리 라틴 가에 자리한 프랑스 위인들의 성전
최인숙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14 06:30:40
▲ 최인숙 문화칼럼니스트·정치학박사
‘에밀’에 이어 ‘사회계약설’이 출판되자 루소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독일의 칸트와 피히테는 특히 인민 주권을 옹호하는 ‘사회계약설’을 칭송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주권 개념이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반발했다. 파리 의회는 루소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제거하려 했다. 체포 위협을 느낀 루소는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로 갔다. 그러나 그곳 역시 루소의 피신처는 아니었다.
 
다행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1763년 5월12일 루소에게 망명과 귀화를 허락했고, 루소는 뇌샤텔 공국의 모티에르로 피신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원치 않았고 심지어 집에 돌맹이를 던졌다. 자식을 버린 아버지라는 비난도 퍼부었다. 루소는 모티에르에서 숨어 지내며 아르메니아인 복장을 했다. 아마도 그는 외국인처럼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고독한 방랑자가 된 루소는 이 모든 책임을 간접적으로 볼테르에게 돌렸다. 루소는 볼테르에게 편지를 보내 “당신이 원했기 때문에 마침내 나는 당신을 미워합니다”라는 말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볼테르는 깜짝 놀라 “루소가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는 미쳤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달랑베르에게 보냈고, 루소와의 관계를 모두 단절해 버렸다.
 
▲ 파리 라틴지구에 있는 팡테옹 외부모습. 위키피디아
 
사실 루소와 볼테르의 관계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 이 둘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악화시킨 사건은 1755년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이었다. 그해 11월1일은 가톨릭 축일인 만성절.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 세 차례 연속된 진동이 발생하면서 폭이 5m에 달하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이 지진으로 리스본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됐다. 볼테르는 공포에 질려 즉시 리스본 지진에 관한 시를 발표했다. 이 시에서 그는 한심한 어조로 신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를 루소에게 보냈다. 그러나 루소는 ‘대가의 작품’이라고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이 시는 “나의 슬픔을 자극하고, 나를 흥분시키고, 나를 절망에 빠뜨립니다”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악의 본질에 있습니다. 죽음은 그 이전의 준비 과정 때문에 거의 악에 가깝지만, 대부분의 사상자는 우리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루소는 리스본의 재앙을 자연 재해로 축소하는 볼테르의 관점을 문제 삼고 나섰던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이들은 부딪쳤다. 1755년에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기초에 관한 담론’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했으나 문명에 의해 타락했다”고 말하며 모든 악의 근원은 재산권 탄생에 있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와 평등의 옹호자였다. 그러나 볼테르는 “우리를 바보로 만들려고 이렇게 많은 재치를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당신의 작품을 읽으면 네 발로 기어가고 싶을 정도입니다”라며 루소를 조롱하고 모욕했다. 이후 두 철학자의 공개적으로 단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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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들의 견해는 첨예하게 엇갈렸다. 게다가 ‘볼테르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권좌에 앉아 있던 노철학자는 새로운 별이 나타나자 위협을 느꼈고 볼테르의 질투는 나날이 커져만 갔다. 때마침 1758년 루소가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La Lettre à d'Alembert)’를 썼다. 이 편지에서 루소는 제네바의 극장 금지를 주장하며 논쟁을 벌였다. 제네바의 델리세 저택에 극장을 짓고 있던 볼테르는 루소가 시대에 뒤떨어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달랑베르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 루소는 감히 우리에게 짖어댑니다. 그에게는 이중적인 배은망덕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공부한 예술을 공격하고, 자신에게 칭찬을 쏟아낸 당신을 반격합니다.”
 
▲ 루소와 볼테르가 마주하고 있는 팡테옹 내부모습. 위키피디아
 
이렇게 사사건건 으르렁거린 두 천재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것은 1764년 연말, 루소가 그의 연인 테레즈 르바쇠르 사이에서 출생한 다섯 아이를 버렸다고 볼테르가 비밀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루소는 부인했지만 이는 진실이었다. 상처를 입고 점점 더 고립된 루소는 ‘고백록’을 써서 자신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겸손하지 않다고 여겨져 루소의 ‘고백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출판이 금지됐다. 루소는 이리저리 떠돌며 가난한 방랑생활을 하다 류머티즘이 악화돼 프랑스 와즈 주 에르메농빌에 있는 그의 친구 지라르댕 후작의 집에서 1778년 7월2일 눈을 감았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인간 세상을 떠난 것이다.
 
루소도 인간이었기에 숨을 거두면서까지 볼테르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신은 죽은 루소가 볼테르를 만나 화해할 기회를 만들어 줬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혁명군들은 국립 팡테옹을 개장해 두 철학자의 유해를 영원히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했다.
팡테옹은 파리 라틴지구 중심부에 있는 위인들의 성전이다. 정치적 격변기를 통해 국가의 위대한 인물들의 유해를 안치하고 있다. 이곳은 본래 국립묘지가 아닌 생트 주느비에브 교회였다. 죽을 병에 걸렸던 루이 15세는 기적적으로 소생해 파리의 수호성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한 교회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이곳을 위인들을 모시는 집으로 개조해 완공했다. 그리고 1호 주인공으로 1791년 사망한 미라보를 모셨다. 그의 뒤를 이어 같은 해 볼테르를 2호 위인으로 이곳에 데려왔다. 이로부터 3년 후 루소가 볼테르의 맞은 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살아 생전 그토록 시끌벅적하게 결투를 벌였던 두 철학자는 이렇게 해후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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